“When we talk about Autism as a ‘diagnosis’, we give credibility to the idea that Autistic neurology is disordered and defective. When we talk about Autism as an ‘identity’, we reframe that idea to one of legitimacy and celebration. Reframing Autism.”(우리가 자폐를 ‘진단’의 시각에서만 이야기한다면, 자폐인들은 장애를 지닌 결함 투성이의 사람들이란 생각에 근거를 준다. 우리가 자폐를 ‘정체성’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런 부정적인 관점을 존재의 정당성을 축하하는 생각들로 바꿀 수 있다.)

방학식 전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벤의 소아과 전문의 캐서린은 해마다 담임교사에게 설문지를 보낸다. 목적은 여러가지다. 담임교사가 자폐인 벤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벤의 전반적인 학교생활(학습면/또래관계/행동적인 면/정서와 감정적인 면 등)을 가늠하고자, 그리고 벤에게 추가로 필요한 지원이나 도움의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도구다.

몇 년을 반복하다 보니 보이는 것이 있다. 사소해 보이는 과정이지만, 여러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가령 자연스럽게 교사를 벤의 지원팀으로 합류시키고, 일반 교사의 해당 장애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자동으로 끌어 올리고, 의사와 부모가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이다.

복도에서 벤의 1학년 때 담임인 스미쓰 선생님을 만났다. 얼마전에 벤에게 자폐 진단을 공개했다는 나의 말을 듣고는 스미쓰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원하시면 벤에게 저도 자폐인이라고 전해주세요.”

와락 그녀를 끌어 안고 싶었다. 스미쓰 선생님은 우리 가족의 은인이다. 스미쓰 선생님이 벤의 담임이던 즈음, 벤과 비슷한 또래의 그녀 아이들은 이미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은 후였다. 덕분에 그해 나는 장애계 입문 선배인 그녀가 건네주는 위로와 정보에 기대고 의지하며 낯선 나라에서 아들의 ‘자폐성 장애 진단’이란 암울한 시기를 건넜다.

더 매력적인 일은 우리 둘 사이엔 학부모와 교사 관계를 넘어선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것이 깊게 뿌리를 내렸고, 둘 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서 서로 읽고 있던 자폐 관련 책을 공유하고, 자폐 관련한 최근의 연구 흐름을 나누고, 강연을 소개하며 함께 성장했다.

당연히 일년 동안 벤은 학교생활이 즐겁고 엄마인 나도 안심하고 벤을 등교시킬 수 있었다. 내가 벤의 눈빛과 몸짓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무슨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면, 두 자폐인 자녀를 키워내는 스미쓰 선생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폐 아동의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과 경험으로 이해하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호주에 사는 1세대 한국 이민자의 고충과 어려움을 호주 로컬들이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와 같은 처지에 놓인 1 세대 한국 이민자가 경험으로 공감하는 정도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할까?

읽기와 쓰기를 제법 잘하는 벤이 수시로 작문 수업 중에 “I hate writing.(난 작문이 지겨워)/ I don’t know what to write.(뭘 써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라고 거침없이 저항/거부의 의사표현을 한다면 나와 스미쓰 선생님은 바로 알아챌 수 있다.

벤의 뇌가 수많은 정보에 압도 당하고 과부하에 걸렸다는 사실, 과제를 다시 잘게 쪼개서 한 개씩 순서대로 제시해주면, 즉 벤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맞춰 제공하면 벤은 아주 훌륭한 글을 써낼 수 있는 아이라는 사실 말이다.

오해는 이해로 바뀐다. 비장애 아동들도 그렇듯 진짜로 쓰기 싫은 순간도 있을 수 있으나, 진짜로 이해할 수 없어서,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느 정도의 분량을 써야 할지 몰라서, 어느 정도로 써야 만족할 만한 글쓰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부정적인 말로 표현을 하는 것이다. ‘나 좀 도와주세요!’ 결국 교사에게 보내는 SOS신호이지 교사를 괴롭히거나 수업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비자폐인에겐 생소하고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벤과 그녀 아이들의 엉뚱한 말과 행동은 우리들의 주된 이야기 소재이고 웃음의 근거였다. 그리고 그녀는 학년 말 리포트(한국의 생활기록부와 유사)에 ‘벤은 독특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랑스런 아이입니다. 함께 생활한 일년이 행복했습니다.’라고 기록해 줬다. 얼마나 근사한 경험인가? 내 아이가 속한 ‘발달장애 세계’를 부정적인 시각이 아닌, 긍정의 시각으로 묘사하는 교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

“작년에 저도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내 아이들을 이해하고 자폐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저도 자폐인이란 결론에 도달해 있더라고요.”

마침내 본인도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스미쓰 선생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란 말이 이런 순간에 적용되는 것일까? 자폐를 본인의 정체성과 가족의 문화로, 그리고 자긍심으로 받아들인 자폐 당사자인 교사가 벤과 같은 학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감격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앞으로 그녀가 학교의 후배 자폐 아동들과 부모들에게 내미는 연대의 손길과 말 걸기 시도는 얼마나 멋진 일인가!

호주에서는 스미쓰 선생님처럼 교사들이 자폐인 임을 종종 공개한다. 교수들이 자폐인이자 성소수자임을 공개한다. 자폐 아동의 부모 교육을 자폐 당사자가 한다. 자폐 당사자인 보조교사(한국의 특수 실무사와 유사)가 장애 아동들을 지원한다. 스탠딩 코미디언이 본인의 자전적 경험인 ‘자폐인으로서의 삶’을 소재로 정형인들(Neuro Typical)에게 자폐인(Neuro Diversity)의 문화를 알린다. 그것도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비자폐인에게 한계가 없다면, 우리 자폐인에게도 한계가 없다.”

대학은 갈수 있을까, 직업은 구할 수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혼자서 독립할 수 있을까…

벤이 자폐인 임을 인지한 초창기에는 아들의 불확실한 미래와 주변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매일매일이 불안하고 고독했다. 하지만 자폐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한 지금은 나만의 착각 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일상에 존재하는 마법의 세계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항상 내 주위에 있었다는 사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 또는 그들의 문화에 무지해서 그들의 세계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나의 영혼을 갉아먹던 깊은 불안과 공포의 자리를 희망과 기대가 서서히 대체하고 있다. ‘자폐인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자폐는 불능이 아닌 또 다른 재능일 뿐이라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선배 자폐인들이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덕분에 오랫동안 포기했던 일, ‘꿈꾸는 엄마’로 다시 태어났다.

다양한 존재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다채로운 미래를 기다리고, 건강한 자폐인으로 자란 벤이 또래, 동료, 후세대 자폐인들에게 연대의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는 엄마의 삶, 제법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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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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