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 관련된 이해도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장애와 관련된 경험들은 단어에 굶주려 있다.”(앤드류 솔로몬)

엄마도 자폐인이야?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들이 물었다. 그래서 답했다.

“벤, 엄마는 자폐인이 아니야. 그런데 가끔 너처럼 자폐인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곤 해. 그러면 너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테니스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벤이 질문을 시작했다. 오히려 반가웠다. 본인이 자폐인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혼자의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이 순간을 위해 엄마는 오랫동안 대답들을 준비해왔다.

이제 초등 4학년이 될 아이에게 진단명을 알려줘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벤이 만나는 심리 상담사와 함께 부모 상담을 잡아서 진단 사실을 공개하기 위한 적절한 언어들과 방법들을 최종적으로 점검 받았다.

참고로 호주국가장애보험(NDIS, 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에 등록이 되어 펀딩(정부지원)을 받게 되면 부모 상담비, 부모 교육비, 해당 장애 관련한 서적 구입비, 해당 장애 관련한 전문가들의 강의나 세미나 참여 비용 등을 지원받을 수 있어 부모들의 해당 장애 이해와 인식을 높일 수 있다.

마치 좋은 길일을 택하듯이 고르고 골라 벤에게 진단명을 알려주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도 된다고. 엄마나 아빠, 벤이 만나고 있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볼 수 있다고 말해줬다.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전날 자폐성 장애와 진단 사실을 듣던 벤이 물었다. <자폐와 자폐인>, 만 9살 어린이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주 로컬 지인들은 진단을 받고 아이에게 바로 공개하는 경우가 흔한데, 아들의 진단을 받아 놓고도 전달하는데 2년 걸렸다.

전문가들은 가능하면 어릴 때 벤에게 진단 사실을 공개하기를 권했다. 그래야지만 본인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사회관계에서 혼란이 적고, 자폐적 특성들을 본인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왜 사람들과 있으면 자주 외톨이가 되는 느낌을 받는지, 다른 친구들은 가지 않는 다양한 프로그램(Therapy)에 참여하는지 등의 이유를 알면서 자라야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내가 벤을 통해 매일 경험하는 특별한 일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나부터 자폐란 ‘장애’보다 아들 벤이라는 ‘사람’ 자체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벤이 ‘다르다’는 사실을 엄마 스스로 죄의식도,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없는 상태에서 건네주고 싶었다.

하루 동안 나름 혼자서 고민을 해봤나 보다. 질문이 이어진다.

“나처럼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거야? 엄마 같은 사람이 많은 거야?”

“엄마 같은 사람이 많아. 그런데 자폐인들도 세상에 참 많아. 몇 년 전에 미국 질병통제 예방센터(CDC, 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에서는 68명당 한 명의 어린이가 너 같은 자폐인이라고 했어. 그런데 요새 전문가들 중에는 50-55명 당 한 명 정도라고 말하기도 해. 앞으로 너 같은 아이들은 계속 늘어날 거야.”

자동차 속 거울에 비친 벤이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기다린다. ‘많은 정보들을 다시 벤의 뇌의 정보 처리 속도에 맞게 처리하고 있는 거겠지.’, ‘너도 이해해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구나, 엄마가 처음에 그랬듯이!’ 눈앞이 얼룩진다.

“벤, 엄마 친구 엘리 아줌마랑 벤자민 아저씨랑 루이랑 노아 형제 알지? 루이랑 노아도 너 같은 자폐인이야. 그리고 엘리 아줌마도 자폐인이고, 아저씨는 ADHD를 지녔어. 아줌마가 이 사실을 너에게 말해줘도 된다고 했어. 아줌마 말에 자폐인으로 사는 일은 자긍심을 갖는 일(Being proud to be Autistic)이라고 너에게 꼭 전해 주라고 하셨어.”

벤의 눈이 흔들렸다. 본인이 알고 있던 또래 아이들이 자폐인이라니!

“루이랑 노아도 나처럼 자폐인이라고?”

“벤, 자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invisible) 경우가 많아.”

“그럼 우리 학교 친구들 중에도 있어?”

“그럼, 당연히 있지. 그런데 이런 사실은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먼저 언급하지 않는 거야. 사람들 마다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이 다르고 아주 사적인 영역이야. 그리고 부모들 중에는 자식이 자폐성 장애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

차를 갓길에 댔다. 계속 벤의 표정을 살피며 운전을 하려니 위험하기도 했다.

“그럼 친구 중에 나랑 비슷한 친구가 있으면 내가 알려줘도 돼?”

“아니.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가끔 부모 중에는 자식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거든. 존중해야 해.”

“근데 그 친구는 알고 싶을 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본인이 알고 싶어한다면 결국 알게 될 거야.”

“그럼 내가 친구들하고 놀 때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자폐 인이거든!>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물론 되지. 그런데 의학적 조건을 공개할 때는 조심해야 해. 세상에는 엄마나 아빠처럼 자폐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야. 그래서 네가 자폐인이란 사실을 놀림감으로 여기고 이용하려는 친구도 있을 수 있어. 네가 자폐인으로서 자신감과 자긍심이 생긴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아.”

나의 길어지는 설명을 벤이 저지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엄마, 이제 그만 말하고 집에 가자. 피곤해.”

사실 벤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벤에게 진단을 내려준 큰 이유 중 하나는 엄마인 나 자신을 위해서다. 엄마가 원하는 사랑이 아닌 벤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주겠다고, 그리고 비자폐인 아이들과 벤을 계속해서 비교하며 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같은 과정이었다. 그리고 발달장애 세계를 알지 못했던 부끄러운 과거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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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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