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부르는 행위, ‘이름 짓기’. ⓒPixabay

과거, 내가 자주 하던 말, “김용구 환자 왔어요~!”

몇 해 전까지 나의 삶은 끝을 알 수 없는 재활의 연속이었다. 재활과정은 작업치료와 물리치료, 근육이 굳지 않도록 풀어주는 FES라는 기계까지 붙이는 과정을 하면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가는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시간이 경과하여 재활병원에서 나와 요양과 재활을 병행하는 가까운 병원으로 통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료시간이 가까워져 평소처럼 매트 한 곳에 자리를 맡고 앉았는데도 치료사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담당치료사에게 “00선생님, 김용구 환자 왔어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환자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터라 나의 이야기를 못 들었던지 대꾸도 없이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00선생님, 김용구 환자 왔어요~!”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그때서야 치료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던 치료사는 연신 죄송하다며 황급히 돌아와 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치료 중간에 치료사는 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다. “김용구님, 평소 늘 저를 부르면서 이야기 하실 때, 저는 김용구님이 굳이 ‘김용구 환자 왔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평소와 다른 진지함에 나는 잠시 긴장했다.

나는 속으로 ‘뭐지? 본인이 늦은 것이 미안해서 하는 소린가?’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본인이 스스로 ‘환자’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지속적으로 환자라고 인식하고 생활할 수밖에 없어요. 환자가 아니라 그냥 김용구님 이예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무엇에 한 방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때까지 내 스스로 ‘환자’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그 환자라는 무의식이 나를 표현하는 말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치료사도 가족도 이웃도 나를 두고 ‘김용구 환자’라 부르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환자’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마다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 속에는 정체성이 드러난다. 평소에 ‘돈’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돈과 관련된 일에 결부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여자(남자)’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여자(남자) 문제없는 사람이 드물다. 말은 정체성이고 그가 자주 쓰는 말을 통해 그가 누군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 말, 그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호칭)이야 말로 그(그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부르는 이름, 호칭(呼稱)에 대해 이야기 하려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가끔 SNS 상에서 열심히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어떤 분의 글을 읽을 때가 있다. 그분은 장애인의 집을 직접 방문해서 돌봄을 하시는 분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매우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분의 글에는 항상 ‘오늘 ㅇㅇ에 가서 장애인을 만났다’, ‘장애인과 통화를 했다’, ‘장애인과 식사를 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의 기록인 SNS의 글일 뿐이고, 그가 만난 분이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라서 그리 표현했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리 표현된 글을 읽을 때마다 그 글 그대로 삼키지 못하고 늘 목구멍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있다.

굳이 활자에서 조차 그가 만나는 분이 장애인으로 대해지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 하면, 당사자의 이름이 아니고 장애인으로 불리는 것이 불만이다. 불리는 그에게는 이름이 없고 장애인만 있다.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어려우면 가명이라도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배움의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후략).”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런 사람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개념을 짓는 행위’라고도 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도 사람이다. 이름이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할 것이며 그것이 맞다. 혹여 그가 자신이 ‘환자’, ‘장애인’이라 인식하고 있더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서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당연하다.

장애는 양상일 뿐 그의 존재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를 대표하지 않는 양상에 함몰되어 살 필요는 없다. 오늘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에 생명을 불어 넣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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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칼럼니스트 한남대학교 내 한남장애인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으로 대학과 병원, 복지기관 등에서 강의, 집단 및 개인상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2009년 심장마비 후 척수경색으로 인해 척수손상 장애인이 되었으나 ‘비갠 뒤 푸르름은 그 의미를 더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다. 교육학과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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