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말 안듣는 마우스와 더 말 안 듣는 노트북과 씨름 중이다. 어제는 안 듣는 마우스 때문에 짜증이 나고 오늘은 화가 나는 중이다. 사무실을 나와 마우스를 구입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으나 원하는 색깔과 디자인의 마우스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없었다.

그냥 대충해서 써야겠다.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레임 보다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에 맞춰 딱 맞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이 없다라는 실망감이 커져 가는 요즈음이다.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일의 시작은 이랬다. 가끔 연락하는 발달장애인 당사자 어머니가 계셨다. 가정형편은 별로 좋지 않다. 아들에게 신경을 쓴다고 썼으나 커가면서 상황은 더더욱 안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았으나 적정한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원인이 불분명하니 아이를 하루종일 집에 둬서인가 자책감이 들었다. 좋다라고 하는 것은 다 시켜보고 얼마의 돈이 들건 아이가 좋아진다면 뭐든 시도해 보았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살 기간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발달장애인 당사자 어머니의 숙제라셨다.

최근 발달장애아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사건 몇 건을 들지 않아도 그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일인 것이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항상 이후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피곤한 삶이다. 가끔 아이를 보며 눈물을 짓기도 할 것이다.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매일을 울어도 변화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고, 매일의 반복은 그 자리를 맴돌았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과거를 반복하고 “엄마나 아빠가 죽을 때 같이 죽는 거라고...” 아이를 서럽게 할 것이다. 늘 같은 모습의 아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실 장애인이 어린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할 수 있는 경험이 많지는 않다. 어려서는 병원이나, 치료실에서 온갖 주사나 약, 침, 기타 등등의 시료를 받아야 했고, 조금 커서는 학교를 다니며 되지 않는 공부들을 따라잡기 위해 책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꿈을 꾸고, 거기에 맞는 과정들을 거치기에는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다.

현재도 비슷하다. 장애인이 어른으로서 갈 수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서빙, 혹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볼 경험조차 해보기가 어렵다.

슬픈 일이다. 누구든 장애인의 가족이 될 수 있고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굳이 몇 년 전 통계를 들지 않아도 선천적 장애인보다 후천적 질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될 비율이 90% 이상인 것이다. 그 안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기뻐할 일은 아니다. 계단 때문에 가계를 이용하지 못하고,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볼 것이다. 그들이 그로 인해 집에만 있게 된다면 사회적 비용을 본인들이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일을 해야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아들이 작업장에도, 복지관에도 갈 수 없어 자신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간 줄곧 집에만 있는다고 하셨다. 활동지원 시간이 짧아 저녁 몇 시간 밖에 이용을 하기 어렵다고 한다. 아들은 점점 더 도태되어 집안에만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좋아진 것도 있다. 아들의 장애나 짧았던 집중력은 조금씩 좋아져 카페에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일을 하러 나가 있는 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줄고 어머니가 관심을 두는 기간이 길어진 변화였다.

누구도 부모님만큼의 관심과 사랑은 주기 어려우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아들과 전에 나눈 이야기 중에 어머니에게 가장 고맙다라는 이야기를 긴 기다림 속에 한 적이 있다. 아들과의 대화에 아버지는 빠져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며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분노와 함께 외면했을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가끔 술을 드시면 울곤 하셨다. 가끔 이유도 없이 슬픔이 훅 오르는 것이 그 이유일지 모른다. 아이의 아버지 역시 우리 아버지처럼 아이 걱정에 슬프고 분노할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의 분노와 외면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른들의 감정을 물리칠만한 힘이 없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에 반복되어진 사슬로 웬만해서는 끊기가 어렵다.

며칠 전 외부자문 위원들을 모셔놓고 발달장애인 사례지원에 대해 논의한 일이 있다. 자문위원들의 입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으나 발달장애인의 행동수정이 되어져야 자립을 위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행동수정. 부모님도 몇 십년을 가르쳐도 잘되지 않는 것을 해내라고 하는 것이다. 그건 나도 하기 어렵다. 행동수정은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뭔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위선은 떨지 않기로 했다. 그냥 집에만 앉아 시간을 죽이는 모습이 보기 싫고 그 어머니들의 눈물이 싫다. 나와 내 어머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일이다. 모두가 비슷한 시간들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누군가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일을 이해해 줄 한 사람이 누군가가 아닌 내가 될 수 있기를 원한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별로이기는 한데 나도 자신은 없다.

나도 숨이 턱에 찰 만큼 힘들고 길바닥에 주저 않고 싶을 때도 많다. 그렇기에 슬픔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혼자는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발달장애인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한다. 혼자는 할 수 없다.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힘과 마음을 가진 따뜻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재가장애인 역시 이제 시설로 보낼 수 없는 시간들이 다가온다. 그럼 우리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장애인들을 보호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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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주 칼럼니스트 현재 삼육대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 장애 전반, 발달장애 지원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장애인 당사자로 당사자 지원에서, 일상생활에서 장애로 인해 느꼈던 것들을 전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체장애인으로 보여지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어 일상생활 자체가 글감이 될 수 있어 나는 좋은 칼럼니스트의 조건을 갖고 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거의 매일 쓰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매개로 생각하고 지나다니다 본 것들에 대해, 들은 것,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다. 전동휠체어 위에서의 일상, 지체장애인으로의 삶에 대해 꿈틀꿈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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