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같은 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시각장애를 겪는 염전 노동자가 “섬에 팔려가 도망갈 수 없으니 구출해 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께 보냈다. 어머니는 이 편지를 경찰에게 넘겼다.
염전노예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21세기에 노예가 있을 수 있냐는 반응이 나오며, 대한민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염전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노동 착취는 물론 폭언과 감금까지 당하며 10년 이상 오랜 세월을 보냈다. 염전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염주는 자신들 눈앞에 있었다. 쉽게 탈출하지 못하게 염전 노동자들에게 빨간 바지를 입혔다.
빨간 바지를 본 동네 주민들과 경찰은 염주에게 연락하기 일쑤였고, 아무런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도 피해장애인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염전업주에게 되돌려보냈으며, 완도군 등의 지자체도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장애인에게 조치 내리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지자체가 피해장애인의 삶을 보호할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염전노예가 드러난 후 신안군의 여러 지자체에서 염전 여러 일대를 전수조사하기에 이르렀다. 피해자들이 구출되고 가해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일이 벌어졌다.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거나, 가족 지원이 쉽지 않은 피해장애인의 숙식을 제공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재판부의 이런 시각은 피해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며,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장애인 학대의 사회적 본질을 외면한 채 원인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기에, 장애인단체들이 모인 염전공동대책위원회(이하 염전공대위)에서 인권적 관점의 판결을 내리라고 재판부에 강력항의하기도 했다.
또한 공대위에서는 염전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노동력 착취와 학대 등을 방치한 국가와 지자체에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의 소송을 했다. 처음에는 재판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심에서 원고 2명에게 각각 3000만 원, 1명에게 20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에서
염전노예를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는 항소했고, 공대위는 여기에 대해 강력항의했다. 이후 판결에 법 위반 등의 특정사유가 없으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결정을 재판부에서 내리며
염전노예 국가책임 소송이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