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표정을 짓고 있는 풍선들. ⓒ픽사베이

어쩌다 보니 올해로 11년째 병원을 오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재활을 마치고 병원로비에서 동료와 마시는 한 잔의 율무차는 마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얼마 전, 여느 날처럼 동료와 대화를 나누던 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내 시선이 움직였다.

환자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 가득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머금고 쏜살같이 병원로비를 지나 밖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기에...’ 같은 시간 그 로비에서는 환자의 치료종료를 기다리는 간병인들의 수다와 외래환자들로 북적이는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로비를 가로지른 그 한 사람의 마음보다 어수선 할까...

상담을 전공한 지라 사람들을 만나면 비언어적인 표현이 자주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황한 자기표현보다 단순한 행위 하나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좀 전에 로비를 지난 여인의 표정에서 그녀가 겪었을 정서적 상황,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 상황에 그저 북받쳐 흘릴 눈물 말고는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드나들고 적잖은 사람이 심각한 상황으로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일상인 요양병원에서 한 사람의 감정 따위가 뭐 그리 대수로 느껴질까 싶기도 하지만 그 한 사람을 통해 잊고 있던 ‘주변인의 고통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모든 장애가 그러하지는 않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척수손상장애, 이 장애를 입고 나면 적지 않은 기간을 타인에게 나를 의지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가족은 본인이 겪고 있지도 않은 일임에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육체적, 정서적으로 환자와 유대와 적대를 반복하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그 기간은 가혹하리만치 느껴지는 ‘험악한 세월’이다. 심각한 경우 가족이 환자를 등지거나 환자가 주변인을 등지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환자에게나 가족에게 가장 취약한 시기임에도 그 시기를 어찌어찌 그냥저냥 흐르게 둔다.

그 기간 이들에게 어떤 정서적 지원도 고려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의학적, 물리적 좀 더 나아기 사회적 지원까지는 제도적으로 손이 닿지만 한 사람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정서와 심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Paul kennedy의 척수장애인을 위한 스트레스 관리(장혜인 등 역)의 서문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적합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를 ‘의료서비스 실제에서의 가변성’이라고 말한다.

환자는 특정한 자기의 질병과 관련하여 가장 최신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나 실제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적용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치료만 받고 병원 문을 나서는 것이 치료의 전부일까? 그것이 진정 ‘최선입니까?’ 묻고 싶다.

이를 충실히 지켜내려 노력한 좋은 예도 있다. 지난해(2019) 국립재활원 용역사업으로 충남대학병원 권역의료재활센터(조강희 교수팀)에서 시행한 ‘중증척수장애인을 위한 일상홈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정서적지원 분야를 맡아 상담과 일상생활 코치를 겸하여 참여 진행한 적이 있다.

중도에 척수손상 장애를 입은 당사자에게 트랜스퍼와 휠체어 활용, 정서적 지원, 신변관리와 사회복귀 전반에 관해 병원기반으로 재활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부터 신체적 재활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보다는 정서적 지원 프로그램을 한주 프로그램의 앞뒤로 배치하여 시행하였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척수손상 장애를 입은 이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 다학제간 팀접근을 하면서 초기 면접 시부터 (동료)심리상담 전문가로 동석하여 심리평가를 주기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울과 불안, 좌절 등의 지수 변화를 검증된 척도를 사용하여 점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반적 치료과정에 적용한 결과, 매우 좋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과정 간 정서관리는 신체적 재활에 시너지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심리적 지지와 정서관리가 프로그램을 더 원활히 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보면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람과의 만남이상이다. ‘한 사람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생의 역사와 마주한다’는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낮은 단계의 정서적 개입에도 적지 않은 효과를 경험하곤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만의 다양한 자기정서의 표현법과 접촉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표현을 의식의 흐름대로 놓아두도록 돕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험악한 세월, 오롯이 그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그 또는 그들만의 몫이다. 그러나 외롭지 않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그 시기를 통과하는 방법이 있다면, 나의 속사람을 지혜롭게 드러내고 감정의 흐름을 통해 정서적 정화를 경험하며 그 길을 행진하는 것이다.

짧은 기간 장애를 이겨낸 무용담(武勇談)도 좋다. 절대자의 힘을 빌어 다시 선 간증(干證)도 오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애를 가진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얼굴가득 북받치는 감정을 어딘가에 묻어두고 쌓아두지 말고, 누구라도 붙들고 퍼내어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이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제도적 뒷받침이 된다면 비단에 꽃을 더한다던, 그 말,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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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칼럼니스트 한남대학교 내 한남장애인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으로 대학과 병원, 복지기관 등에서 강의, 집단 및 개인상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2009년 심장마비 후 척수경색으로 인해 척수손상 장애인이 되었으나 ‘비갠 뒤 푸르름은 그 의미를 더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다. 교육학과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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