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님께서 “이제 비오고 그럴텐데, 밖에 나와 있지 말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저상 올 때 나와있으라”며 전해주신 쪽지. ⓒ심지용

올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긴 글렀다. 분명히 어제가 “역대최강한파”라고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오늘이 더 “역대최강한파”란다. 본의 아니게 매일 거짓말을 하며 사는 거다. 우는 애한테도 얄짤 없는 산타가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리가 없지 않나? 너무 추워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날리는 눈발을 가르며 멋있게 달려오는 휠체어 탄 장애인도 사실 춥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눈이 멈추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이뤄진다 해도 얼어붙은 손발은 녹을 기미가 없다.

이 고생을 하면서도 근처에 위치한 건물에 들어가지 않는 건 버스를 놓칠까봐서다. 그러다가 기사님이 못 본 척 지나가기라도 하면, 이러려고 기다렸나 자괴감이 든다.

그날도 그랬다. 칼에 손이 베일 것 같은 고통을 참고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앞머리 부분이 둥근 버스가 도착했다. 저상버스다. 이때 한 동네에 오래 살고 있는 프리미엄이 작동한다. 기사님은 아는 분이었고, 탄다는 신호를 드리기도 전에 발판(버스와 지상을 잇는 슬로프)을 내리고 계셨다.

근데 발판이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사님은 버스를 최대한 정류장에 붙이시곤 시민 한 분과 휠체어를 들어 태워주셨다. 차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밖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세상이었다.

저상버스가 한국사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계기는 2001년 1월 22일에 발생한 한 장애인의 죽음이었다. 그는 오이도역서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장애계에선 이동권 투쟁이 시작됐고, 2005년 ‘교통약자편의증진법’이 제정됐다. 4년여에 걸친 투쟁으로 얻어낸 쾌거 중 하나가 저상버스 도입이었던 거다.

저상버스는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꾸준히 운행대수와 보급률이 증가했다. 그러다 지난해 처음으로 이 수치가 감소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에 따르면, 저상버스 운행대수는 2010년 3204대에서 2015년 6737대까지 2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6447대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서울을 비롯한 6개 광역시의 저상버스는 4336대로 비율이 전체 시내버스의 26.3%였지만, 세종시와 9개 광역도의 저상버스는 2111대로 12.1%에 불과했다.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한 건 4년여 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저상버스를 취재하고 난 뒤부터다. 그때 만난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승차거부를 당해봤다”며 조금 늦어도 콜택시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헌데 기사님들의 말은 달랐다. 정기적으로 저상버스에 장애인을 태우는 것에 관한 교육을 받는데, 정작 타려는 장애인을 못 봤다는 거였다.

실제로 기사 분들은 매우 친절하셨다. 2년 전 4월엔 한 기사님으로부터 뜻밖에 선물을 받았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마침 신호에 걸리자 기사님이 내게 오셔 종이 한 장을 건네셨다.

자신이 운전하는 버스가 속한 번호의 버스들 중 저상버스의 차 뒷번호들이 적혀있었다. 손수 적어주신 거다. 그리고 버스 앱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비오고 그럴텐데, 밖에 나와 있지 말고 검색해서 저상버스 올 때 나와 있어!” 마음 따뜻해지는 한마디였다.

몇 년 전부터 장애인들의 관심사는 고속버스였다. 명절이나 연말 등 지역에 갈 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은 고속버스를 탄다. 하지만 여기엔 리프트가 없다. 고로 장애인들은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던 지난달 31일 장거리 버스에 휠체어 탑승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애인들은 환호했다.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법에 큰 구멍이 나 있어서다. 원안에 있던 ‘장거리 노선버스 운송사업자가 휠체어 탑승설비를 연차별, 단계별로 설치하도록 의무화’하는 조항이 삭제된 거다. 이로 말미암아 운송사업자는 휠체어 탑승설비를 설치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됐다.

“장애인콜택시 등 이미 이동수단이 많다”며 의무화 조항을 삭제한 국회와 오보를 해놓고도 정정 보도조차 없는 일부 언론들의 행태를 보면, 장애인들에게 한파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그럼에도 봄이 오리라 믿는 건 최강한파에 언 버스보다 추위에 떨고 있는 장애인을 생각해 어떻게든 버스에 태우려 하고, 비 맞으며 기다릴 장애인을 염려해 쪽지에 저상버스 번호들을 적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은 얼지 않았다. 결국 최강한파에도 얼지 않는 건 사람들의 마음뿐이다.

그러고 보니 산타도 사람이다. 아이의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마음은 마음으로 안아줄 때 가장 행복하고, 따뜻하다. 크리스마스가 겨울에 있어 참 다행이다. 올 크리스마스엔 따뜻한 마음을 선물하고, 받으시길.

사족 하나. 국회의원들을 믿는 것보다 산타를 믿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기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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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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