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기 쉽고 모두 함께 누리는 장애인권리협약 ‘나 여기 있어’ 표지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4년 2개월 동안 연구소 생활을 하며 필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위원회 활동이다.

권리협약의 어려운 말을 알기 쉽게 바꾸는 작업이 가치 있다는 생각에 연구소에 입사하기 전 수습기간부터 이 활동에 참여했다.

연구소 입사 전 연구소에서는 일본의 발달장애인들이 알기 쉬운 권리협약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일본의 한 교수님은 한국에도 알기 쉬운 권리협약서를 만들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연구소는 이 제안을 생각한 후 알기 쉬운 권리협약 책을 만들어 발달장애인에게 알리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구소에서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 목적으로 자기옹호 프로그램을 2년 이상 하거나 권리에 관심이 있는 발달장애인들을 모집했다. 모집한 7명의 발달장애인들이 모여 2011년 3월 12일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권리협약을 알기 쉽게 만드는 일에 지원자와 같이 뛰어들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이 일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을 제작위원으로 위촉하고, 발달장애인들로 이루어진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위원회’를 결성하는 일이 있었다.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위원회’ 결성 및 제작위원 위촉식 때의 모습들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제작위원들에게는 어려운 조문을 쉽게 바꾸는 작업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위원들이 공부를 하고 나서야 쉬운 문장으로 바꿀 수 있었고, 경험한 것과 관련한 조문은 지원자가 약간 설명하는 걸 들은 후 조문을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다.

또한 지시적인 말과 표현에 익숙해있던 위원들에게 권리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이라, 위원들은 발달장애인의 권리, 권리의 개념 등을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게다가 제작위원들은 대개 직업을 갖거나 직업훈련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주말에 모여 어려운 내용의 권리협약을 알기 쉽게 바꾸는 작업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일에 모여 밤늦게까지 작업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위원들에게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만드는 일은 힘든 과정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1년 반이면 만들 수 있다고 연구소와 지원자, 제작위원들은 생각했다. 위원들 모두 열심히 하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권리를 알아가는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안에 알기 쉬운 권리협약 책을 만드는 게 상당히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도중에 작업을 그만 두는 위원들이 생겨났고 제작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에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만들기를 제안했던 일본의 한 교수님에게 제작보고회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져 죄송하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라고 연구소에서 필자에게 지시했다. 2번 이상 메일 발송한 걸로 기억한다.

메일 발송 후 교수님은 메일 답변에 ‘괜찮으니 제작보고회 날짜만 알려주면 내가 가겠다.’는 내용으로 매번 연구소와 필자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메일 보내는 게 2번 이상 지속되다 보니 교수님에게 미안한 감정도 들고, ‘못 만들면 어떡하지?’하는 감정까지 밀려왔다.

그 와중에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고 느낀 데다 개인사정까지 겹치게 된 위원들이 또 생겼다. 그 위원들은 작업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지원자와 필자, 연구소는 마음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민해 내린 이들의 결정을 존중했다.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당시 누구나 알기 쉽고 모두 함께 누리는 장애인권리협약 ‘나 여기 있어’ 제작보고회 초대장 중 일부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하지만 3~4개월 후 3명의 위원들이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겠다고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왜 돌아왔는지 몰랐지만,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 위원이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권리협약 만드는 작업을 잠시 중단한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할 때보다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며 공부했던 때가 더 좋았습니다.”

이 위원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누가 시키지도,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결국 스스로의 판단으로 하겠다는 내적 동기가 생겨 권리협약을 다시 만들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생겨 돌아온 것이었음을...

나머지 위원들도 이 위원처럼 3~4개월 동안 스스로 하겠다는 내적 동기를 다진 후 연구소에 와서 다시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만드는 작업에 속도는 붙었고 결국 제작위원들은 2013년 10월 8일 누구나 알기 쉽고 모두 함께 누리는 장애인권리협약 ’나 여기 있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만약 지원자가 급해진 마음에 빨리 해야 한다고 남아 있는 위원들에게 재촉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면 그 위원들은 지쳐서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만들고 싶은 내적동기를 잃어버리고 결국엔 책이 안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위원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다시 위원들에게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만드는 내적 동기가 생길 수 있도록 믿고 기다린 지원자들의 결정과 태도가 ‘나 여기 있어’라는 책을 만드는 데까지 이른 요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발달장애인에게 내적 동기가 생기려면 지원자는 발달장애인 자기옹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필자가 알게 된 순간, 그때서야 자기옹호가 정말로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느리더라도, 지원자들이 발달장애인의 속도를 존중했을 때, 책 제작에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내용이 이해하기 쉽게 쓰인 ‘나 여기 있어’라는 책이 나왔음을 필자는 깨닫게 되었다.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을 제작하고 난 후, 위원들에겐 책임감과 권리의식이 상당히 높아졌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다른 분야를 공부하겠다는 내적 동기도 더 높아져 연구소에서 또 다른 공부모임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4~6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흥분되고 짜릿하다.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을 세상에 내놓으며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세상을 향해 외쳤던 그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복지관, 직업재활시설 등에서 성과에 얽매인 나머지 발달장애인의 속도를 존중하지 않고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말을 지인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속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발달장애인에게 그건 폭력이다.

오히려 발달장애인에게 재촉하지 않고 발달장애인의 속도를 존중하고 발달장애인을 믿으며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발달장애인에게 내적 동기가 생기며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해 재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럴 때 복지관, 직업재활시설 등에 계시는 종사자, 사회복지사 분들께서는 그렇게도 원하던 확실한 성과를 발달장애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으실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쉽지 않은 줄 알지만 이것을 사회복지사, 종사자, 지원자들은 절대로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발달장애인에게는 자기옹호인 것이리라.

발달장애인의 속도를 존중하고 발달장애인에게 내적 동기를 가지도록 지원하는 것! 이것이 2년 반 동안의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과정 시 필자가 배우며 명심해야겠다고 느낀 강한 메시지다.

다음번에도 권리협약 제작과정 관련 칼럼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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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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