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왜 결혼하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답변을 많이 내 놓을 수 있다. 너무 사랑해서, 매일 같이 있고 싶고 헤어지기 싫어서, 나이가 차고 때가 되어서, 혼자 살기는 외로워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

반면에 우리는 왜 부모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 명쾌하고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 ‘아! 결혼 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도, ‘아! 엄마가 되고 싶어.’, ‘나는 꼭 아빠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를 포함하여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 삶의 목표인 사람을 나는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부모가 된다는 건, 그저 결혼만 하면 당연히 증정품으로 따라오는 남들 다 받는 패키지상품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그 당연한 줄 알았던 증정용 패키지상품이 따라오지 않음을 깨닫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갑자기 ‘부모됨’을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로 여기며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별 탈 없이 나이 들어, 큰 어려움 없이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하고, 둘만의 삶이 심심해질 때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찾아와 준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모됨’이 그렇게 간절한 명제가 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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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피콜트의 소설 '쌍둥이별'. ⓒ은진슬

조디 피콜트의 ‘쌍둥이별’이라는 소설에는, 백혈병에 걸린 언니 케이트의 치료를 목적으로 부모의 철저한 계획 아래 유전자를 수정하여 태어난 안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부모의 철저한 계산과 목적성을 기반으로 맞춤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 언니에게 제대혈, 조혈모세포, 혈액 등을 제공하며 살아간다.

안나는 소설 초반에, 세상의 많은 아기들이 하룻밤 불 같은 사랑과 술에 취한 정사로 태어나는 것에 비해 자신의 출생은 얼마나 목적지향적이며 무거운 것인지를 제법 시니컬하게 이야기 한다.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를 가져야 하는 나름의 절박하고 간절한 의도와 목적성이 있는 경우나, 오랜 불임으로 너무도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중의 대부분은 어쩌다 엄마, 얼렁뚱땅 아빠가 되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도, 다가올 역할에 대한 성찰도, 공부도, 실기 준비도 부족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지고 결혼을 하여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솔직히 결혼부터가 이들에게는 생각 없이 저지를 수 있는 부류의 사안이 아니다. 장애 아들을 가진 엄마들은, 우리 아들은 비록 장애가 있지만 그것 빼고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출중한 아이니 당연히 비장애여성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한국의 남성중심적 사고로 무장한 부모들이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장애 딸을 가진 엄마들은, 너도 배울 만큼 배웠고 저들보다 못할 것도 없는데 ‘저런 취급’ 받지 말고 그냥 혼자 살라고 말한다.

사실, 장애 딸을 둔 부모님들이 딸 가진 죄인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악성 정서 탓인지, 산수와 이치에는 훨씬 밝고 공정한 편이다.(비장애인 부모들의 관점은 아예 논외로 하자. 말 안 해도 쉽게 이해가 될 테니…)

우리 남편의 부모님만 해도, 장애 정도도 비슷하고, 교육 수준도 비슷한 내게, 우리는 그래도 반대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것이니 이해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렇듯, 장애인의 결혼이라는 것은, 숱하게 나를 내려놓는 득도의 수련을 거쳐야만, 성사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부류의 문제인 것이다.

결혼이 이 정도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데, 부모가 되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장애인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왜 애를 낳느냐, 장애 때문에 해줄 수 없는 것들이 있을텐데 그걸 부모로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 애는 무슨 죄냐, 애만 불쌍하니 낳지 말아라…

장애인의 결혼, 출산과 육아를 이토록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환경 탓에, 장애인들은 술과 사랑에 취한 즉흥연주와도 같은 하룻밤으로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등의 사고(?)를 마구 저지를 만한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러니,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결정을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반대가 있다면 그 반대를 불식시키기 위한 자기 증명도 해 내야만 한다.

이 치열한 과정을 통해, 장애를 가진 잠재적 부부나 부모들은, 과연 내가 배우자로서 살기에 적합한 인간형인지,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 힘든 조건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나에겐 부모의 자격이 과연 있는지, 내 아이가 나와 같은 부모를 맘에 들어 할지 등등을 끊임 없이 질문하며 나 자신의 ‘부부됨’과 ‘부모됨’의 적합성을 고민하고 탐구한다.

우리 부부 역시 당연히 이 과정을 겪었다.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부모 준비는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장애인들은 늘 사회로부터 그들의 능력에 대한 검증을 요구 받는다. 그러니 늘 열심히 준비하고 증명하며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주변 장애부모들은 정말 혼신의 노력으로 아이를 잘 키운다.

물론, 우리에게는 보통의 부모와 다름이 분명 존재하며, 그 다름이 종종 나와 아이를 조금 아프게도, 불편하게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부모는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육아에 임한다.

나보다 약하고 미숙하다고 여기기 쉬운 아이에게 부모로서 갖기 쉬운 아집과 권위를 철저히 내려놓고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속살을 기꺼이 드러내며 아이에게 내 장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과정은, 부모와 아이 모두를 격이 다른 성장의 길로 이끌어 준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부모로서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약한지를 잘 알고, 늘 고민하기 때문에, 그 대안을 찾고 보안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 정도면, 별 생각 없이 아이를 낳고 부모 노릇을 하는 사람들 보다는 나은 건 아닐까?

세상에는 퍼펙트 베이비가 없듯, 퍼펙트 맘도, 대디도 없다. 함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 가족이란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은진슬

한 가지 더.

엄마가 장애인이라서, 아빠가 장애인이라서 애들이 불쌍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퍼펙트 베이비가 없듯, 퍼펙트 맘도, 퍼펙트 대디도 존재하지 않는다.

40년 전, 장애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인식이 팽배했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차별도, 어떤 구별도 없이 110% 오롯이 나를 믿어 주시며 이렇게나 잘 키워 주신 훌륭한 부모님이건만, 이런 멋진 부모님을 가진 나 조차도 내 부모에게 100% 만족하지 못한다. 아마도, 당신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부모는 가난하고, 어떤 부모는 성격이 나쁘고, 어떤 부모는 아프고, 어떤 부모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비약하자면, 그 누구도, ‘아! 저 아이는 너무 불쌍해. 부모가 돈이 없어 집도 없이 전세로 살잖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장애를 가진 부모의 아이들만 불쌍하다고 함부로 판단하며, 무신경하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걸까?

그 이유는 딱 하나, 우리의 ‘약점은’ 저들의 ‘약점’보다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설령, 장애를 가진 내가 엄마라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은 힘든 일을 경험하며, 겪지 않아도 되는 아픔을 겪는다 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내가 지는 빚이냐 아니냐는 철저히 아이와 나 둘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일 뿐이다.

제3자가 함부로 판단하며 왈가왈부할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만약, 아이가 이 ‘다름’을 잘 다루며 이해해 준다면, 한없이 고마운 일일 것이며, 설사 그렇지 못한다 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아이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장애부모로서 내가 할 일일 뿐이다.

비록, 6년간의 길지 않은 엄마 노릇이었지만, 부모의 높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 장애 여부 같은 것들이 ‘부모의 자격’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결정요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부분이 잘 갖추어져 있다면, 아이가 좀 더 안락한 삶, 더 많은 선택지와 가능성, 더 풍부한 경험을 가질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가진 엄마인 내가 생각하는 ‘부모됨’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내 삶 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를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를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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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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