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연애한 후 결혼한 동갑내기 내 남편과 나는 신혼 초 2-3년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남편의 잘못된 생활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살 눈치 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언젠가는 바뀔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맞춰가자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싸움은 잦아들었고 결혼 3년차에 우리는 예쁜 딸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띠게 달라졌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기를 지켜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런데 아기가 100여일이 지날 무렵 나는 갑자기 쓰러졌고 그 후유증으로 나는 하루아침에 전맹이 되었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아기는 내가 쓰러짐과 동시에 시댁에 맡겨졌고 그 후 긴 병원생활과 공항상태에 빠진 내 정신상의 문제로 딸아이는 1년 넘게 아빠,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4개월쯤 내 품을 떠난 내아기는 18개월이 되어서야 아장아장 걸어서 내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 딸아이가 벌써 8살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딸아이가 내 품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행복하면서도 두렵기도 했었다. 이제 아장아장 걸으며 단순한 단어로만 의사표현을 하는 아기가 앞을 못 본다는 것을 이해할리는 만무했고 한창 호기심이 많은 시기이니 혹시라도 위험한 물건을 만져 다치지는 않을지 내가 움직이다 아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에 항상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와 단둘이 집밖을 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 주말이었다. 출장관계로 남편은 집을 비웠고 아이와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며 이런 좋은날 집에만 갇혀 지내야하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용기 내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4살이었던 딸아이는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내손을 잡고는 살살 이끌다가 어느 순간 잠시 멈추고서는 “엄마, 계단”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가르쳐준 적도 없었고 아이가 내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는데 겨우 4살인 아이가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엄마, 계단" 이라고 말해주는 모습에 가슴 한켠이 뭉클했다.

딸아이는 엄마가 보지 못하기 때문에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는 사람들이 엄마에게 그렇게 해주었고 단둘뿐이니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딸아이는 물건을 손에 쥐어주는 등 가르치지 않은 행동들로 나를 놀래키곤 했다.

한편 2-3년 동안을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던 남편이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된 아내에게 맞춰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것이 지금에서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남편이 그럴 거라 생각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비장애인일 때조차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던 사람이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나는 더듬거리는 몸짓 외에는 달라져 보이는 게 없었고 보지 못하는 나는 더 이상 남편의 행동에 이렇다 할 잔소리를 할 수 없었으므로 남편은 내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 생활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각장애를 가진 후 2-3년 동안은 집안에서 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놔둔 물컵을 걷다가 쏟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방문이나 장롱문을 삐딱하게 열어두어서 문 모서리에 찍힌 것만도 수차례였다.

TV리모컨을 아무데나 놓아두고 출근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으며 쓰고 난 과일칼이나 가위를 설거지통에 그냥 담가놓아서 손을 베인 적도 있었다.

남편의 행동을 볼 수 있다면 미리 그러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항상 내가 직접 겪은 뒤에야 얘기할 수밖에 없었고 얘기를 해도 몸에 익은 습관이라 또다시 반복되곤 했다.

남편과 나는 10년 동안 연애를 했고 올해로 결혼생활도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결혼생활 10년 중 비장애인으로 4년을 그리고 시각장애인으로 6년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행동에서 나와 4년밖에 지내지 않은 딸아이의 행동과 남편의 행동은 왜 다른 것일까?

몸에 익은 습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모델링의 부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알버트 반도라는 인간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들으며 학습한다는 사회학습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적요인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모델링함으로서 학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 양육환경이나 양육방식을 알 수 있고 중범죄자의 경우 그 사람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즉, 딸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엄마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을 모델링함으로서 자연스레 학습되었고 남편은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방법을 모델링 한 적이 없었으므로 하나하나 직접 경험하며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모델이 되어줘야 하는 오늘날 기성세대들의 장애인식은 어떨까? 솔직히 나는 딸아이나 딸아이의 친구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더 솔직하고 바람직한 장애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장애에 대해서 궁금해 하며 대하는 행동이 서툴 뿐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기며 피하거나 불손함이 없다.

특별히 더 배려해서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장애가 있는 나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준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이고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모델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장애인을 배려하고 도움을 줘야한다고 배웠지만 주위 어떤 어른들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다.

설령 아이가 도와주려고 다가가려고 하더라도 엄마는 그러지 말라며 아이의 손을 놓지 않는다. 게다가 장애인을 몸이 불편한 불쌍하고 동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가르치거나 장애인을 훈육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못된 장애인식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의외로 많다.

사실 예전에 비해 장애인복지가 향상되어서 거리의 비장애인의 도움이 절실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거리에서 “도와드릴까요?”하며 다가와 물어봐주는 비장애인들을 대할 때면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도움 받은 것 이상으로 감사하고 고마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배려는 이런 말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한다.

거창한 말이나 눈에 띠는 과한 행동만 모델링 되는 것은 아니다. 직관력 있는 아이들은 사소한 몸짓, 표정, 억양 등을 통해서도 감정과 느낌을 학습한다. “안녕하세요”하는 인사말처럼 장애인을 보면 “도와드릴까요?”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비장애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많은 아이들이 이타심과 배려를 학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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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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