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아기집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은진슬

아이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싹싹하고 조곤조곤 말도 잘 하는 아이를 보며 예뻐하시는 어르신들이 꼭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말이 있다.

‘너 동생은 없니?’

‘엄마한테 동생 낳아 달라고 해야지?’

그러면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요즘은 하나 키우기도 너무 힘들다고 해서요……'

이쯤에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면 다행이지만, 어르신들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형제가 있어야 한다, 혼자 자라면 외롭다 등등의 말씀을 보태시며 속 모르는 말씀들로 나를 난처하게 만들곤 하신다. 의외로 이러한 대화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하고만 나누게 되는 것은 아닌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맞닥뜨리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불임이다. 이응이를 낳자마자 자궁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각장애 초보엄마로서 신생아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긴장되는 상황에서 의외의 조금 커다란 암초에 걸리게 되니, 아무리 시크한 나라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제왕절개를 했던 탓에, 출산으로 생긴 자궁의 손상이 회복되어야만 수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석 달 동안 확진과 그 후의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다른 의사들의 소견을 듣느라 여러 가지 검사들을 진행했다. 방사선을 조사할 일이 많다 보니 검사를 할 때마다 3일 동안은 갓난아기에게 젖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젖이 돌 때마다 모유를 유축기로 짜서 통째로 버려야만 했다. 특히, MRI나 PET-CT를 찍고 나면, 반감기가 다 지날 때까지 만 하루 동안은 갓난아이를 안아 주지도 못하고 떨어져 지내야만 했는데, 이 부분이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몇 년간 가장 힘든 일이었다.

아직 말도 못하고, 상황 판단도 못하는 아이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싶어, 검사를 하는 날이면 아이를 친정에 맡기거나, 차라리 아예 아이가 잠들 때까지 종일 백화점과 커피숍 등을 돌아다니다가 밤 10시쯤 집에 들어가곤 했다.

처음 1, 2 년은 아이가 너무 어려서 자꾸 아이가 눈에 밟히고 마음이 편치 않아 이 시간을 즐기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자람에 따라 이 시간은 혼자이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뜻 밖의 선물 같은 시간이 되어 주기도 했다. 금식의 끝에서 혼자 멋진 만찬을 즐기기도 하고, 조용히 혼자 앉아 글을 쓰기도 했으며, 아기 키우느라 잘 보지 못했던, 나를 봐도 해가 되지 않는 어른 친구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세 살쯤 되니 의사소통이 잘 되어서 그 때부터는 내가 어디에 무엇을 하러 가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며 이해를 구하니, 아이는 잘 받아 들여 주었고, 나를 기다리면서도 아빠와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어찌 아이 생후 1 년 간의 아이와 나의 암투병 고군분투기를 이 좁은 지면에 다 풀어 놓을 수 있겠는가?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아이가 네 살쯤 되니, 동생이 있거나, 곧 동생이 태어난다고 자랑하는 주변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인식하며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고민을 했지만, 앞으로 1, 2년은 이런 이야기를 할거라는 생각에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싶었다.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정면 돌파, 고해성사 모드였다.

엄마의 장애에 대한 이해를 구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동생을 가질 수 없어 속상할 아이 마음을 어루만지며 왜 엄마는 동생을 낳아줄 수 없는지를 아이 눈 높이에 맞게 설명해 주었다.

‘이응이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미안하지만 엄마는 이응이에게 동생을 낳아줄 수는 없어. 이응이가 갓난아기 때 엄마 아기집에 나쁜 돌이 생겼는데, 그 돌을 그냥 두면 엄마가 너무 아파서 의사선생님께서 아기집과 나쁜 돌을 모두 수술로 없애야만 했거든.’ …

이렇게 담백하고 무심한 듯 이야기를 해 주니 아이는 ‘아, 그렇구나!’라며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올 3월, 처음으로 방과 후 과정반에 들어가게 되고, 동생들과 형아, 누나들과 함께 재미있게 지내서인지 오랜만에 자기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냈다. 조금 다른 점은, 이번에는 동생을 낳아 달라는 게 아니라 어려운 동생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키우면 안되냐고 물었다.

이동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신생아 예방접종과 내 검진을 동시에 진행하며 아이와 함께 병원에 갔다가 차마 내게 말하기 힘들어 하시던 의사선생님의 암 확진판정을 받았을 때도, 수술 동 의서에 사인을 할 때도 나는 매우 담담하고 시크했다. 심지어, 아이 백일은 기쁘게 치르고 싶어서 가족들에게도 아이 백일축하 모임이 끝나고 얘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미숙아였고, 늘 면역이 약했기 때문에 잔병과 큰병 치례나 입원, 수술 등은 낯설 것도 없는 불유쾌한 친구 같은 것들이었고, 어떤 때는 병원 침대가 집보다 더 편할 때도 있었기에, 이 정도는 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이때까지 별의 별 일 다 겪으며 살아 왔는데, 앞으로 ‘불임’으로 살아간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겠냐고 나 자신에게 별 일 아니라고, 너무나도 호기롭게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겪어보니 의외로 그게 아니었다. 이응이 만 15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나의 대학시절 절친으로 독일의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후배가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어렵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앞으로 닥치게 될 출산과 육아에 대한 걱정, 육아와 연주를 어떻게 병행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나는 1년 선경험자로 어떻게 그럭저럭 살아지고(^^) 있는지에 대해 열띤 수다의 장을 열고 있던 중…

유학시절 심한 자궁근종으로 일시 귀국까지 해서 수술을 받았던 친구와 이미 자궁을 절제한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아기집에 대한 이슈를 이야기하게 되었고, 너무도 담담하게 출산 후의 여러 가지 경험들을 들려주던 나는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도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기에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1 년 넘게 아이를 키워 오면서 단 한 번도 이 문제로 내가 힘들다고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이 같은 악조건 하에서 어떻게 하면 저 작은 생명을 무사히 키워낼 것인가에 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생물학적 여성성을 잃었다고 여겨질지도 모르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내 마음이 무엇을 느끼는지, 얼마나 아픈지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지금껏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날,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외치고 있었을텐데도 전혀 듣지 못했던 그 애처로운 외침이…너무나도 강력하고 본능적인 모성 뒤에 가려져 있던 상처 받고 아픈 내 마음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Sex의 진화생물학적 궁극은 생산이다. 그러므로 그 기능을 상실한 나는 어떤 면에서는 ‘불능의 존재’가 되었다. 내 장애 역시 내게 일정 부분 불능감(?)을 느끼게 했지만, 적어도 이처럼 절대적이고 숨 막히는 불능감(?)은 아니었다. 비록 시각장애가 있어도 나는 대체할 만한 다른 감각과 방법과 능력을 찾고, 개발하고, 밤잠이라도 줄여 가며 그 ‘불능감’을 일정 부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런 답이 없다. 그야말로 절대적 불능인 것이다.

마치 장애 하나를 더 갖게 된 기분이다. 그렇게 내 마음의 아픔을 직시한 그 날 이후, 나는 그것과 직면하여 그것이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만나주고 이야기도 나누며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표현하고 덜어내어 조금씩 가벼워질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는 서두에 제시했던 것과 같은 불편한 상황이 발생해도 좀 더 유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께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관계에서는 내 장애에 대해 그러하듯, 서로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 문제도 오픈한다. 물론, 아이가 이런 상황을 이해할 만큼 자라게 되니 처신하기가 한결 더 편안해 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40 년 가까이 나와 동고동락해 온 ‘시각장애’라는 문제에 대해 아직도 완벽하게 자유롭고 편안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임’이라는 문제 역시 앞으로도 쭉 그러할 것이다.

평소, 내가 글을 쓸 때 키보드를 두드리는 느낌과 속도가 매우 빠른 쇼팽연습곡 정도라면,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는 내 키보드 연주는 매우 느리고 슬프고 문득 문득 한 마디씩 깊은 상념을 떨어뜨리는 듯한 쇼팽 전주곡 Book 1의 4번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써내려 가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극히 공개적인 이 공간에서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슈를 논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임’ 또는 ‘난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사려 깊은 태도와 사생활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프로페셔널 장애인으로 40년 가까이 살아 온 나임에도, 임신 기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아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나임에도, 여성으로서 ‘불임’이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평범한 비장애여성들에게 있어 ‘불임’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는 조금이나마 짐작이 갈 것이다.

당신이, 너무도 당연하고 당위적인 일이라는 듯, 결혼한 가임기의 여성에게 언제 아이를 가질 거냐고 묻기 전에, 첫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게 둘째는 언제 낳을거냐고 묻기 전에,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일어나서 걸어보라는 요구가 더없이 폭력적인 것이듯, 여성만이 가진 아름답고 고유한 능력을 상실한 그 누군가에게 당신이 당연한 듯 던지는 질문 역시 더없이 폭력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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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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