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조금 사그라들긴 했지만, 여전히 언론과 정부기관에서는 '학교 폭력'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지난 13일, 나는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학교 폭력으로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는 합동추모집회 '안녕'에 다녀왔다.

참... 여행 짐을 꾸릴 때도, 대구로 향하면서도, 집회에 참여해 발언을 할 때도, 머릿 속도 가슴 속도 복잡복잡 하기만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 광주. 이 곳 광주에서, 대구까지. 거리도, 교통편도 만만치 않았지만, 꼭 그 탓이 아니더라도 퍽 힘든 여정이었다.

출발 전부터 심한 구토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여행 직전 바뀐 약이 구토를 일으킨 것이다.

출발 전부터 너무나 지쳐, 그냥 그대로 나가 떨어지고만 싶었다.

몸도 몸대로 지쳤지만, 마음이 너무나 복잡해졌기에...

구토. 그게 내 초등학교 때 별명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약을 먹어온 나는, 구토와 두통 등의 부작용에 늘상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구토 증상은 더 심해져 갔다.

그 탓에 나는 학교 생활 적응이 늘 힘들었다. 집에서와는 달리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것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나는 학교에선, 화장실조차 맘대로 가지 못 하곤 했다.

그렇다보니 실수도 잦아지고, 옷을 버리는 날도 많아졌다. 그리고 난 소위 비호감이 되었고, 그 이전부터 몸이 약해 따돌림의 표적이 되곤 해왔던 나는, 그렇게 어느 순간 왕따가 돼 있었다.

많은 경우 왕따를 당하다가도 원인이 없어지거나 학년이 바뀌면 왕따에서 풀린다는데, 나는 그 많은 경우에 해당되지 못했다.

급식을 하면서, 왕따는 더욱 심해졌다. 내가 먹을 수 없거나 먹기 어려운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게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음식들을 억지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르게 여겨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리곤 남몰래 화장실에서 토할 때마다 설움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왕따가 되기에 너무나 많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몸도 약했고, 곧잘 쓰러지거나 코피를 흘리곤 했고, 시력도 엄청 안 좋아 늘 맨 앞자리에서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웠고, 달리기나 운동도 잘 못 했고, 병으로 인해 잠도 많고 늘 피로해 했고, 집안 형편도 좀 어려웠다.

도저히 바뀔 수 있는, 고치거나 나아질만한 조건이 왕따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집안의 간섭이나 오해 등으로 인해 잠시 왕따이다가 언제보니 왕따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난 왜 눈이 나쁠까, 난 왜 아픈걸까, 난 왜 잠이 많은걸까, 난 왜 체력이 약할까, 하며 매일 자학 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새엔가 나는 내가 왕따인 것에, 외톨이인 것에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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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새 칼럼리스트
희귀난치병으로 인한 전신만성통증으로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중증 시각장애인. 스스로를 안드로진(중성), 레즈비언, SMer(사도마조히즘 성향을 가진 사람)로 정체화한 성소수자 청소년이다. 나이주의와 가족주의, 가부장주의, 남성중심주의를 거부하며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인권활동가다. ‘장애인&운동현장 이슈, 인권 이야기’,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사랑과 연애, 성생활’ 등의 다양한 얘깃거리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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