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에서 인간이 모든 잘못에 대해 자유롭고 싶은나머지 자기방어 기재가 작동돼 '남의 탓'으로 하는 것을 시정하고자 ‘내 탓이오’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집 대문과 자동차 앞 뒤 유리창에 스티커를 붙이기도 해 그러한 스티커는 천주교 신자임을 알리는 상징과 같은 기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라는 캠페인은 사회문화의 새로운 켐페인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천주교의 핵심 신앙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미사의식에서 항상 바치는 기도문의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여성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고, 장애인에 대해서도 매우 수구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문화와의 교류 속에서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보수성이 있었기에 신 앞에서의 평등과 인간 존중을 변하지 않고 지켜왔을지도 모른다.

양심은 변하지 않으나 관습은 오히려 낡은 생각을 정당화한다. 그 관습 속에 녹여져 있는 억압과 차별을 벗겨 내려면 '당신 탓'을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신에게 행하는 것과 같으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돌보는 것이 종교적 윤리다. 종교는 약자의 편인 것이다. 그리고 약자가 지상 최고의 권력을 사실상 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약자 위에 군림하고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나의 탓으로 돌리고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행동방식을 찾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행동이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 불과하며,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시대적 철학도, 양심도, 평화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구약에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율법이였으나, 예수는 ‘죄가 없는 자가 있으면 그러한 여자를 처벌하라“고 하여 용서해 주었다.

이와 같이 어떠한 세상이 와도 변할 수 없는, 그리고 변하지 않아야 하는 진리가 있고, 반면에 세상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만 진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브가 매일 밤 아담의 갈비뼈를 헤아리며 또 다른 여성이 생기지는 않았는가 평생 노심초사 고민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받았는지 누가 알겠는가?

억압받는 자의 위로자이자 대변자로서 종교는 역할을 하고 있고, 실제로 예수는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과 병자와 항상 같이 행동했다.

종교가 억압하는 자의 편에 있는 이상 비판력은 힘을 잃게 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고고한 자세로 은둔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소외된 자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잘못하면 종교는 약자의 외로움에 접근하여 약자를 두 번 울리는 비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장애인은 장애가 된 것이 내 탓이라거나, 장애인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내 탓이라든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내 탓이라든가, 열악한 환경에서 억압받는 것이 내 탓이라든가, 복지 서비스를 이만큼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이라거나, 차별을 받고 있는 환경이 내 탓이라거나, 능력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내탓이라고 한다면 종교는 장애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억압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바쳐진 부가 선행에도 사용된다는 상징을 위해 장애인에게 나누어진다면 그것 역시 시혜의 독이 된다.

장애가 당신 탓이고, 사회 탓이고, 국가 탓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내 탓으로만 학습받아왔기에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마음만은 착하고, 그래서 고통에 대한 보상을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 생각하도록 강요당했다.

내가 장애가 아니라 사회가 장애이고, 내가 육체적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니라 편의시설과 배려가 없는 사회가 장애이며,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 편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건물이 장애 몇 급의 등급을 가진 장애인 것이다.

‘내 탓이오’ 켐페인 스티커가 나의 머리 맡에, 내 책상 앞에, 내 운전석 앞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대문 밖에, 자동차 뒤편 유리창에 붙여지는 것은 내가 ‘내 탓이오’라고 반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내 탓'임을 알아라고 가르치는 위압적 고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장애인의 문제는 분명 '당신 탓'이다. 성경에 장애로 태어난 것은 부모도 자신의 탓도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였던가, 그런데 그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사회는 분명 당신 탓인 것이다.

수급자로 살게 하면서도 그 것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탈출하면 오히려 엄청난 손해를 보게 하는 제도, 헌법에서 장애인은 아예 능력이 없어서 국가가 보호한다고 한 것,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으로의 제약이 장애라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 등은 당신 탓에서 나온다.

장애는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장애인이 평등하지 않고 기회가 균등하지 않은 것은 분명 당신 탓이다.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막힌 것은 당신 탓이다. 장애를 사회의 부담으로 여기고 우생학적으로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당신 탓이다.

안전한 생활을 위해 봉사한다는 보험이 손해의 가능성에는 가혹할 정도로 방어적이어서 인권을 무시하는 보험업자들(보험가입 거부는 보험은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업체가 시민에게 빨대를 꽂는 드라큐라임을 증명한다.), 정당한 요구에 대해 사회적 기여도 없이 서비스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비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하는 정부, 당신들 탓이다.

도대체 종교가 말하는 그 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를 만든 것을 언제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도 보이는 자에게만 보인다면 보편성을 잃은 것은 아닌가?

당신 탓은 책임을 전가하거나 불만분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장받자는 것이다. 국가의 지원은 있어도 보장은 없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시행령과 시행규칙에서는 보장은 하지 못하고 지원만 한다.

즉 책임자가 주는 정도를 조정하는 권력을 가진 것이다. 권리가 권력이 되지 못하고 공급자가 권력자이면 그 것은 당신 탓이 되어야 한다.

올해의 총선과 대선 후보자를 선택할 때 장애인 문제를 자신 탓으로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가를 물어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으면 한다.

반값 등록금과 무상보육은 사회적 책임을 분명 포함하고는 있으나, 사회적 선행이고 정치적 돌봄의 결과로 인식해야 하는 문제라 누구 탓이라거나 권리로 인식하기에는 주제가 핵심적이지 못하다.

마땅히 장애문제가 핵심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투표수를 나타내는 인구의 부족이라면, 그 후보의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한 공약은 사후 보상의 부도 가능성이 높은 매표 행위가 될 것이다.

장애인들은 '당신 탓'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사회는 '내 탓'임을 알아야 장애인 정책은 바로 설 수 있으며, 모든 사회의 정책에 장애인 정책이 포함되어야만 자신의 탓에 대하여 할 말이 생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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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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