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탈시설을 해야 하고 시설은 없애야 하는가?

이에 대해 다떼이와 신야 교수는 ‘장애학’에서 시설은 집단생활을 하기에 개인 선택권이나 사생활 보호가 없고, 폐쇄적이어서 지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떼이와 신야 교수의 주장을 다르게 설명해보면, 장애인의 권리가 서비스 제공만으로는 보장될 수 없고, 특별한 서비스는 시설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시설에는 ‘학대’와 ‘나쁜 대우’가 만연하고 ‘관리’와 ‘격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의 일원성과 개인 공간의 부재, 정체성과 성의 박탈을 의미한다.

시설 운영자는 시설은 주거대책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주거를 해결해주는 주거시설이 아니냐고 항변하지만, 주거시설 중 가장 악조건이 시설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항변은 수용되지 못한다. 그리고 서비스의 경직성 관리비도 비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설의 문제는 현상학적인 문제이고, 시설의 기원과 유래를 살펴보면 더욱 탈시설 문제는 선명해진다.

사람들을 처음 만나 인사를 할 때에 가끔 본관이 어디냐고 묻는다. 본관이란 고려 시대에 주거지를 묻는 것으로, 본관제도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백성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허가 없이 본관을 떠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백성을 철저히 관리하고 억압하기 위한 제도였다.

서구에서의 시설은 전쟁에서 다친 환자를 ‘불구’로 보고 한 곳으로 모아 사회로부터 은폐하려는 것에서 퀸즈벵트(300명이라는 뜻)가 생겨났으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상이군경이 국가에 대하여 민생대책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 해 주었다는 무마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시설이다.

원래 엘리자베스 여왕(1600년)이 최초의 사회복지법 성격인 구민법을 제정하여 도시빈민이나 실업자들을 한 곳으로 모은 것도 시설의 유래이며, 이러한 시설에서 국가를 위해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살아가도록 한 교육을 하였으나 마지막까지 탈출하지 못하고 남은 것은 장애인이었다는 것이다.

소록도의 한센병원처럼 사회로부터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사회의 범죄나 거리의 지저분함을 정리하고, 국민들의 생활공간을 안전하고 쾌적하게 치안 유지를 하기 위한 청소 차원에서 시설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시설 이용 대상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제거 대상으로 간주하였으며, 멀리 보내고 잊고 살고자 했던 것이다.

시설에 입소하면 최하의 서비스는 주어지지만, 그 대신 평생 그 곳에서 연명만 하게 되어 아무런 미래가 없이 숨만 쉬도록 사육한다.

올해 보건복지부에서는 장애인복지법을 대대적으로 손을 봐서 시설의 기준을 현대화하고 소규모화하여 시설을 고급화시키겠다고 하지만 시설은 아무리 고쳐도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탈시설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증이거나 능력이 되지 않아 시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라고 시설의 기능과 역할, 필요악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가는 시설에 일정 금액만 던져주고 그 사람들의 문제를 일단락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 시설이었다.

시설의 서비스는 전문적 서비스라고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전문적 서비스를 왜 시설에서만 해야 하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장애인을 위한 대부분의 서비스는 비전문적이고, 비전문적이어야 당연한 것도 있다. 대부분의 가정은 요리사를 따로 두지 않지만 식당밥보다 가정집 밥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설 서비스의 저변에는 단지 물리치료 등 서비스를 한 곳에 모아 두면 관리하기가 편리하다는 공급자의 편리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예산 편성도 시설이 편리하다. 필요한 예산을 추정해 집행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중복과 누락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행정적 편의가 가능하다. 욕구는 무시되고 실적만 있으면 결과는 정리된다.

활동보조와 같이 보편적 서비스가 이루어질 경우 전국에 얼마나 수요가 있는지, 그리고 서비스의 자격 적격성 판정과 모니터링 등 복잡한 관리가 필요하다. 욕구를 추정치로 잡아 시행하면 부족하거나 남거나할 가능성이 더 커서 정확히 정해진 금액대로 집행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장애가 없는 사회를 원한다. 사회환경의 장애가 없기를 바라며, 적절한 서비스의 제공으로 서비스 접근성에도 제약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시설 위주의 서비스에 보편적 서비스 접근성의 보장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국가는 장애인이 없는 사회를 원한다. 이 안전한 사회 속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고, 우생학적으로 장애를 예방하거나 장애 범주를 축소하여 장애를 줄이고자 한다.

장애인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장애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고, 체력은 국력이라 장애인은 그 체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적 복지로서 일자리가 최고라는 사고와 그렇지 않은 장애인은 국가가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시설 위주로 진행돼 온 복지는 이제 칼질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장애인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장애가 없는 사회로 전환해야 하며,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의 안착을 지원하고 살피는 권익옹호센터를 통한 삶의 질이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해야 한다.

활동보조서비스만이 아나라 생활의 설계와 서비스 질 관리가 보장되면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도 자립생활은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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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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