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르르르 또르, 짤짤 짜르르르’ 잔디밭 풀섶에서 벌레들이 연일 홍을 돋울 무렵이면 중천에 떠오르는 달 모양이 어서어서 쟁반처럼 둥글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우리 어릴적에만 해도 이렇게 추석날이 다가오면 온동네의 환상적인 추석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고, 그날에 펼쳐질 이야기 꽃이 한창 피어나곤 했다.

드디어 팔월 열나흗날이 다가 왔다. 이 날 나는 무척 바빴다. 학교를 마친 나는 집에 오자마자 솔잎을 따러 갔다. 따라오겠다고 눈치를 보며 빼죽거리는 동생을 간신히 따돌리고 이웃집 친구와 함께 바구니를 들고 뒷산으로 냅다 달려 갔다.

엄지, 검지, 장지 세 손가락으로 솔잎을 잡아당기면 연한 배추빛 끝이 뾰족하게 나오면서 쏙쏙 잘 뽑힌다. 가끔씩 끈끈한 송진이 묻은 고동색 잎받침이 붙은 채로 뽑히면 손끝으로 일일이 빼내야 했다.

소복이 늘어나는 솔잎을 꼭꼭 누르면서 얌전하게, 될 수 있는대로 가지런히 놓으려 애썼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배고픈 것도 잊고 친구의 바구니를 힐끔힐끔 보아가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소나무를 따라 정신없이 다니다가 돌아갈 길마저 잃고 헤매던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집에 당도하였다.

어머니는 올 추석 송편은 더 맛있겠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고 할머니는 손자를 누가 데려갈지 그 색시 호박 떨어졌다고 하였다. 두 손으로 솔잎을 움켜쥐고 코를 대어보면 풋풋하고 싸리한 솔잎 향기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이윽고 마당 한쪽에 맷돌을 내어놓고 고모는 녹두를 갈고 할머니는 자배기 속이 커다란 생선으로 포를 뜬다. 지짐질하는 냄새가 집안 가득하다. 툇마루에는 씻어서 차례상에 올릴 과일과 밤 대추가 소쿠리에 가득 담겨져 있다.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어머니의 그 큰 손으로 둥그렇게 반대기를 지어 치대서 젖은 베보자기로 덮어 놓는다. 식구들이 마루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송편을 빚기 시작한다.

떡 반죽을 밤톨 만하게 떼어 손바닥에 마주 굴려서 옹심이를 만든다. 가운데를 오목하게 벌려 속을 채운 다음 입을 오므린다. 서로 자기 것을 내보이면 할머니 솜씨는 구수해 보이고 어머니 솜씨는 얌전하다. 내가 만든 것은 짱구처럼 크고 못생겼다.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색시 만난다고 어르시는 할머니 말씀에 솔깃하여 자꾸만 예쁘게 만들려고 애썼다. 동글동글하고 갤쭉한 송편이 커다란 두레반과 목판에 가득히 채워지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시루번으로 시루를 고정시키고 솔잎 한 켜 놓고 송편 얹기를 번갈아 하여 하나 가득 채운다.

아궁이에 장작을 어슷어슷 들여 놓고 쏘시게에 불을 지펴 타닥거리며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에 얼굴이 화끈거릴 때쯤엔 시루에서 뜨거운 김이 오르고 열어 놓은 부엌문 바깥은 어느새 어둠이 깔린다.

이윽고 나는 신나게 펌프질을 하여 통에 찬물을 철철 넘치도록 받아 놓는다. 그러면 어머니는 다 된 송편에서 솔잎을 떼어내며 이 물에 재빨리 씻어 소쿠리에 건져서 참기름을 반지르하게 발라 놓는다.

계피향이 은은한 팥송편, 간간하고 고소한 녹두 송편도 있다. 내가 만든 깨송편을 골라내어 한입 꼭 깨물어 오물오물 먹어본다. 쫀득쫀득하고 솔잎내가 솔솔나는 고소한 송편이 감칠맛이 난다. 송편이 다 되기까지 나도 한 몫 한 것이, 어쩐지 어깨가 으쓱했다.

어머니는 미리 손질해 놓은 한복을 꺼내어 머리 맡에 내어 놓는다. 동생은 색동한복이고 내 한복은 노랑 상의에 하얀 바지다. 뭉게구름처럼 새하얀 고무신을 사 온 아버지는 우리 아들, 딸들이 내일은 더 예쁘겠다고 하시며 함박웃었다. 여동생들은 꽃신을 손에 끼고 엎드려서 방을 기어다녀 보기도 했다.

밤늦도록 잠도 안 자고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손을 돕다 보면 문득 앞집 기와 지붕 위로 덩그렇게 떠오르는 달이 내 마음을 공중으로 덥썩 안아 올려 가슴 부풀게 하였다.

또한 앞뜰, 뒷뜰, 마루나 방 어디를 가나 세월 만난 듯 풍성하게 갖추어진 음식과 옷가지를 따라 내 마음은 끝없이 흐뭇하고 뿌듯하였다. 이렇게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내 마음의 까치 추석은 이렇게 지새어 갔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서글프게 변했다. 명절이나 평일이나 다를 바 없이 별 감흥을 못느끼는 요즘, 아이들을 볼 때 마냥 안스럽기만 하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가슴 두근거리던 옛날 우리들의 그 소박함을 되살려 줄 수는 없을까?

올 추석에는 두 아들과 장도 보고 쌀을 담가 송편도 빚어 볼까한다.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례는 내 마음의 까치 추석을 두 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고 싶은 마음이 불연듯 일고 있다.

나의 잊지 못할 그 추억이 늘 변함 없는 하늘의 별들처럼 다시금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픈 마음 간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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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태씨는 군복무중이던 22살 때 수류탄 폭발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꾸준히 장애인계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이자 전북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마라토너이자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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