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 대학과 주택 단지를 오가는 52L 버스. 요즘에는 버스가 내려 앉고 기계로 조정을 하지 못하면 간단하게 경사로를 펴 버리면 되기 때문에 장애인 승차 거부 명분이 서지 않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리프트 시설이어서 손작업으로 하기 싫어 하는 운전 기사가 슬며시 승차 거부를 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버클리 주택 단지에서 대학까지는 버스로 15분 정도 걸린다.

주택 단지 안으로 버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버스를 탈 수 있어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다. 52번 버스와 52L 버스가 학교로 가는데, 거의 10여 분 마다 한 대씩 있어 기다리는 불편도 없다. 한대는 학교 앞길로 가고 한대는 버스 뒷길로 간다.

대부분 운전 기사들은 장애인들이 타면 좌석을 들어 올리고 그 자리에 휠체어를 고정시켜 주는 등 아주 친절하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아침, 한 운전 기사가 리프트가 고장 났다며 태워 줄 수 없다고 했다. 수작업으로 리프트를 내려 달라고 하려다가 다른 학생들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보내버렸다. 다음 차를 타도 되니까. 내가 부지런해서 항상 일찍 학교에 도착하려 일찍 나오니 한 두대 정도 놓쳐도 별 불편이 없다.

그 뒤로 그 운전 기사를 또 만났다. 그가 이번에도 거절했다. 번호만 같을 뿐 다른 버스를 운전하는 데 또 리프트가 고장이 났다는 것은 어딘지 좀 수상한 느낌을 주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이어졌다. 이건 확실한 장애인 승차 거부다. 남 캘리포니아에 살 때 어떤 사람은 운전 기사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하고 소송을 해 8만 달러(8천 오백여 만원)을 받아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번 고소해서 뜨거운 맛 좀 보여줄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바빴다. 장학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 코 뜰새 없이 공부해야 하는데 소송하느라고 법원에 왔다갔다 하다가는 장학생은 고사하고 C학점을 받아 영구 제명을 당할지도 모른다.

버클리는 그렇다. 나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어 억울하지만 꾹 참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나는 몇 번 그런 일을 겪었다.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단체로 불 이익을 당할 때 한꺼번에 고소해서 적지 않은 돈을 벌 때도 나는 바빠서 함께 사인을 하지 못했다.

호텔에 가서 화장지 걸이가 높게 걸려 있다고 고소하고, 매장에 휠체어가 다니는 데 불편할 정도로 좁다고 고소를 하는 등 공익 소송이 잇따르는데도 나는 돈이나 불이익을 처리하는 일 보다는 내 할 일이 바빠서 고소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미국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돈 버는 것도 돈 버는 것이지만 악을 그대로 방치하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준다며 종용을 하곤 한다.

이럴 땐 장애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같아 장애 사회에 미안한 감도 없지 않지만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너무 절실해 시간 뺏기기가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장애인이 불이익을 당하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고소해 사회를 바로 잡아갔다. 그리고 이 곳은 장애 제도가 가장 잘 되어있다는 버클리 아닌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어느 날부터 그 운전 기사가 보이지를 않는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미국의 장애인 제도나 의식으로 보아 다른 장애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해고됐을 공산이 더 크다.

버클리대가 있는 도시에는 장애인 암행어사 비슷한 제도까지 있다는 것을 그 운전 기사는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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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지체장애인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 미국 탐 하킨 상원의원 장애국 인턴을 역임했다. 또한 서울장애인체육회 워싱턴 통신원, 서울복지재단 워싱턴 통신원,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출간한 수필집 ‘사랑, 그 빛나는 조각들’은 1992년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워싱턴 문학 수필부문 가작에 당선됐다. 각종 미국 장애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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