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장애차별철폐의 날이 지나간지 열흘이 되었다. 장애차별철폐의 날 집회에 매년 참여해오지는 못했지만, 올해는 장애인권 동아리 친구들과 4월 18일 토요일 서울역 앞에서 열렸던 문화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문화제, 그리고 ‘빡쎈’ 420 집회가 가지는 집단적, 사회적 의미는 물론 잊지 말아야겠지만,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서 장애인권을 고민하던 나와 친구들이 다양한 이슈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고민의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 사실 가장 좋았다.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휘날리는 서울역 앞마당에서 나는 두 번의, 다른 색깔의 420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4월 20일,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 오전 조회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대뜸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영민이를 위한 날이지”라고 말했다. 내가 휠체어로 다니기 편하게 책상들 사이의 간격을 넓혀놓으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급식을 받으러 갈 때 도와주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장애’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도 싫어했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교실은 3층이었고 가파른 계단을 휠체어로 한참 올라갔어야 했는데, 학교에선 어떠한 지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도 없었고, 미술실, 음악실은 다른 건물 4층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지원을 바랬던 것은 아니고,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그 특별한 ‘나의 날’에 나는 하루종일 친구들의 부담스러운 도움을 받았고, 빨개진 얼굴로 정문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서 헬렌 켈러가 주인공인 만화영화와 ‘장애인의 날 특별 생방송’을 TV로 보았다.

신입생 시절, 처음 참여한 420 집회. 뭐가 그렇게 신나는 표정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서울대 장애인권연대사업팀

신입생이던 5년 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차별철폐의 날’로 처음 불렀던 그 날,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대학로에 나갔다. 빨강 노랑 파랑 패널에 무시무시해보이는 선전문구를 적어 들고서. 장애인이 그렇게 많이 모인 장소에 가본 것도 처음이었고,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본 것도 처음이었다. 행진을 하다 누군가 발언을 했고, 발언이 끝나면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을 외치며 팔뚝질을 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절규하고, 누군가는 답답한듯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절박해 보이는 공간은 처음이었다. 당연한 것은 무엇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무엇일까?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던 것은 사실 네가 아니니? 지금 나부끼는 깃발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뭐가 옳은 것인지 뭐가 옳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꽤나 명쾌한 대답들을 얻을 수 있었다. 끝나고 대학로 어딘가에서 선배들이 사주는 감자탕을 먹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감자탕을 먹어보지 못한 듯 하다.

그 다음해 420은 실험시간과 겹쳐서 참여하지 못했다. 친구들 몇 명이 집회에 나가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그 다음해에는 문화제에도 참여하고, 집회에도 참여했다. 사실 집회는 너무 무서워서 중간에 혼자 도망쳐나왔다. 그 다음해에는 집회에 나갔다가, 다른 장애인의 날 행사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사회복지학과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4월 20일처럼 매 해 다른 생각, 다른 모습, 다른 사람들과 맞게 되는 날도 드물 것이다. 올해는 문화제가 끝나고 새벽까지 남아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매해 변해가는 장애인의 요구들, 그리고 변함없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그분들, 그리고 매해 다른 모습으로 맞게 되는 420과 나의 모습을 정리하면서. 내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그 날이 맞을 수 있을까, 반쯤은 두려움으로 반쯤은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서울대 화학부 04학번,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 진학 예정. 커피와 고양이, 책을 좋아하고 식상함과 무기력을 싫어하는 스물다섯의 귀차니스트. 다년간의 관악산 휠체어 라이딩으로 다져진 팔근육과 연약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지체장애인. '대중의 과학화'를 꿈꾸며 멋진 저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한 과학도. 내게는 일상인 풍경들 속에 나 역시 풍경으로 비춰질까, 부조화한 이방인으로 비춰질가 오늘도 고민-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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