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이킬 수 없지 않으냐?”

아무리 생각해도 사고 당시 서울 큰 병원으로 가지 않은 것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갔더라면 다리를 자르지 않았을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지만 ‘만약에’가 가슴을 후벼 팠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은 추슬렀으나 다른 문제가 터졌다. 절단부위의 상처가 낫지 않고 패혈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패혈증이란 조직이나 기관에 상처가 생겼을 때 감염이 일어나, 이에 대한 면역 반응이 온몸으로 퍼져 생명을 위협할 수준으로 강하게 나타내는 증상을 말한다. 일반적인 예후와 증상은 고열과 심박수 증가, 호흡률의 증가, 어지러움 등이 있다. -필자 주.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매일 매일 수술실에서 염증 부분을 긁어내고 잘라내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황수관 박사의 건강세미나에서. ⓒ이복남

“아버지를 간호하시던 어머니가 저의 절단 수술 소식을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저의 다리를 보시더니 통곡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지경이 되다니……. 어머니는 칠남매 가운데서 유독 그를 예뻐하셨는데 이제 부모가 원하는 며느리를 얻어서 손자도 얻고 살만해지니 다리를 잃다니. 어머니는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그렇게 통곡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어머니가 저를 보고 통곡하셨지만, 저는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를 입었을 때 배우자나 부모 그리고 자녀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고통이나 상실감이 가장 큰 사람은 누구보다도 본인이다. 부모나 자식들의 고통은 세월이 지나면 무디어지지만, 본인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배우자의 고통은 평생을 가져가야 한다.

“제가 수술 후에도 패혈증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인 B 씨가 조그만 원적외선 온열기를 가져왔습니다.”

병원에서는 외부에서 가져온 전열기기를 사용하지 못 하게 하므로 B 씨는 온열의료기를 병원 몰래 사용하라고 했다.

“패혈증이 심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B 씨가 갖다 준 의료기를 병원 몰래 사용했으나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패혈증이 심해 2차 절단을 해야 된다고 했고, 몸 상태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의료기사용 3일째 되는 날 상처 부분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은 작은 희망이 보이면서 온열치료의 신비함에 점점 심취하게 되었다.

“항생제로도 안 되던 염증치료가 원적외선 온열요법으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절단 수술은 안 했고 3주 만에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발목 부분을 절단했다가 2차 3차 수술을 하면서 조금씩 더 절단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자 온열요법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부탁해서 온열요법에 관해 공부하면서 퇴원하면 이와 관련한 사업을 하리라 구상하였다.

“병원에 5개월쯤 있었는데, 4개월째부터 물리치료실을 다녔는데, 사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장애인을 접했습니다.”

중국에서 고객 생일파티. ⓒ이복남

처음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며 한쪽다리로 걷는 연습도 했다.

“의족을 하고 걷는 사람들을 보니까 뒤뚱뒤뚱 걷고 있었습니다.”

첫애가 4개월 때 다쳤었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나는 적어도 아이에게 뒤뚱뒤뚱 걷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습니다.”

지체장애 4급을 받고 의족을 맞추었다.

“의족만 하면 다리가 전처럼 말짱해 지는 줄 알았습니다.”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일어서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대로 꼬꾸라졌다.

“처음 의족을 한 사람의 오만이자, 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는 실수였습니다.”

다시 의족을 하고 이를 악물고 걸음 연습을 했다.

“아이에게 ‘너거 아빠는 절름발이야!’하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족을 하고 재활센터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무릎아래가 절단인데, 의족과 살이 닿는 부분이 까딱하면 앞쪽이 아팠고 나중에는 뒤쪽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염증이 생기고 딱지가 앉고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아파트에 살 때, 집에 들어가면 오른쪽 다리의 의족을 풀고 왼쪽다리로 콩콩콩 깨금발로 다녔습니다.”

하루는 엘리베이터에 ‘콩콩콩 뛰는 깨금발 소리 층간소음 자제해 주세요.’라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 이런 게 장애인의 비애구나’싶어서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의족을 하는 장애인이라고 설명을 했고, 이제는 이웃들도 이해를 했다고 한다.

지역 장애인복지관 등에 문의하면 핸드레일을 설치해 주는데 안 해 보았을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지만, 나중에는 저도 조심을 하고 이웃들도 이해를 해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된장탕 강의. ⓒ이복남

현재 강신주 씨는 자신이 의족 장애인이라고 본인이 이야기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다리를 거의 절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필자가 강신주 씨를 처음 만났을 때, 필자는 그가 4급 장애인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기에 ‘재활을 참 잘 했구나’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는 의족을 하고 퇴원을 했다. 산재장해로 인정을 받아 약간의 연금을 받는다고 했다.

“B 씨가 통영에서 C의료기 체험실 즉 일종의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제가 C의료기 체험실을 하려니까 부산·경남에서 C체험실을 개설할 수 있는 곳이 밀양 밖에 없었습니다.”

가진 돈이 별로 없었기에 회사를 퇴직한 퇴직금에다가 보상금 등을 합쳐서 밀양에다 C의료기 체험실을 차렸다.

“’97년 7월말에 C의료기 체험실을 개설하고 장사는 처음이라 서툴기도 했지만, 엄청 바빴습니다.”

C의료기 대리점은 가정용온열기를 전시하고, 손님이 와서 의료기를 얼마간 체험해 보고 효과가 있으면 구입하는 구조였다.

“아내는 만삭이었는데, 8월 초에 둘째가 태어나서 아내는 마산 언니 집에서 산후조리중이었습니다.”

아내가 언니 집에 가 있는 동안 마산에서 각 대리점 점주들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식중독이 걸린 모양이었습니다.”

마산에서 밀양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너무 배가 아파서 운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내일 아침에 체험실 문을 열어야 되므로 억지로 운전을 했는데 서너 시간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당시 밀양의 C의료기 체험실은 이층에 있었는데, 새벽에 도착해서 계단을 겨우 기어 올라갔다.

“체험실에서 온열기를 배에 깔고 잠이 들었는데 2~3시간 지나서 깨어보니 말짱해진 것 같았습니다.”

마산에서 밀양까지 오는 서너 시간 동안 끙끙 앓으며 겨우 왔음에도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약을 먹어 본적도 없고 병원에 가 본적도 없단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의족은 새로 맞춘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건강 강의 후. ⓒ이복남

“부산 **병원에 계신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도 아버지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아버지가 1~2개월 시한부를 받았는데 더 이상 병원에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퇴원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신장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B 씨가 온열기를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B 씨 이야기는 귓등으로만 듣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패혈증이 나았고, 그날 마산에서의 식중독 사건 이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아버지를 산청 집으로 모시고 온열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판사판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던 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아버지는 아직까지 살아계십니다.”

그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준 C온열기를 열심히 사용했다고 한다.

“마산에서의 식중독 사건, 그리고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보면서 C의료기에 더욱 신뢰가 생겨서 큰돈은 아니지만 영업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영업이 괜찮았다면서 왜 중국으로 갔을까.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설렘이랄까, 그리고 우수한 한국 의료기를 중국에 보급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내가 니를 우째 키웠는데, 그 먼데를 말라꼬 갈라카노, 안 된다 절대로 못 간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집사람도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그래도 제가 가겠다고 했더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혼자 갔을까.

“아니요, B 씨하고 같이 갔습니다.”

그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둘 네 식구의 짐은 230kg 이하여야 했다. 처음 목적지는 연길이었는데 부산에서 연길로 가는 직항로는 없었다. 부산에서 김포로 가서, 장춘 가는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갔다.

가족들과 두만강에서. ⓒ이복남

“2000년 11월 26일에 김포에서 출발했는데 짐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기에 애들이 겨울패딩을 두 개 세 개 껴입어서 걸음도 못 걸을 정도였지만, 장춘공항에 내리니까 얼마나 추운지 그런 추위는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군대도 철원에서 근무했다고 했는데, 장춘 그리고 연길의 겨울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연길에 도착해 보니까, 추위보다도 앞이 안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겨울에 웬 안개일까.

“안개가 아니라 당시만 해도 대부분이 석탄을 때는데 석탄 연기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들이 제일 먹고 싶어 한 것은 한국 과자와 짜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과자와 한국 짜장면을 구할 데라곤 없었다.

“저는 어찌나 한국 소주가 먹고 싶든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소주 한 병을 주고 갔는데 냉장고에 넣어 두고 병뚜껑에 한잔씩 맛만 보았단다.

숙소 옆에 사무실을 차렸는데 석탄 매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새까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그가 생각했던 온열의료기에 대해서는 황무지였다.

“중국 실정에 맞는 온열의료기를 개발하려니까 기술적인 문제나 자금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의 D의료기와 협약을 맺었다.

“2001년 8월부터 연길에서 D의료기 체험실을 개설했습니다.”

처음부터 왜 연길이었을까.

“처음 중국에 갈 때는 중국어도 못했으니까 조선족이 많이 산다는 연길로 택했던 겁니다.”

그런데 D의료기가 가정용의료기로 허가를 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중국에는 없는 것이라 의료기 감독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식 같은 사람에게 뺨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가 몸이 안 좋았는데 D온열치료기로 몸이 나았다.

“그 선교사 덕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사람들은 저더러 화타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루에 800명쯤은 가능한데 1,500명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 일대가 완전 마비되었습니다.”

당시가 방학기간이라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학교 운동장에 줄을 세었다. 방학이 끝나자 더 이상 학교 운동장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연길 강둑으로 나갔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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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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