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권, 코타키나발루 여행기

짜잔! 도착 둘째 날이자 본격적으로 여행다운 여행이 시작된 첫날.

일정은 시내에서 배를 타고 툰쿠압두라만 해양공원에서 스노클링과 현지식 점심.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쉰 다음 다시 탄중아루 비치선 셋 감상. 그리고 시푸드 석식을 먹고 시내에 있는 필리핀 마켓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말레이시아 그것도 코타에 필리핀 마켓이라. 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 같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미미의 설명을 보충하면, 필리핀 이주자들이 모여 생성된 시장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 졌다 한다.

어쨌거나 말 그대로 하루 종이 싸돌아다닌다는 이야기. 여행은 엉덩이 진득하니 붙이고 물집 잡힐 때 가지 책이나 읽는 게 장땡이라는 내 신조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른 일정이라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어쩌겠나 가족 모두 움직이는 거니 따를 수밖에.

​아침 10시. 새팡가르 섬으로 시작했다.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멀미 유발 차를 보고 들뜬 마음이 차분해 졌지만, 안 그래도 후끈한 아침인데 나를 들어 올리고 휠체어 싣고 하느라 동생들은 시작부터 땀범벅이 된 동생들을 생각하니 내색을 못했다.

선착장으로 향해 가는 동안은 미미의 알쓸신잡 역사 강의 시간에 스치듯 귀가 쫑긋해진 '히비스커스'라는 단어. 말레이시아의 국화라는 이야기는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데도 엄청나게 많이 후원이 들어왔던 일이 생각나게 했다. 그때 그 음료가 바로 히비스커스였다. 그때 욕을 엄청 했었는데. 그 양심도 없는 업체는 여전히 그러고 있단 말이지.

유통기간 얼마 남지 않은 식료품 후원은 삼가해줬으면 싶다. 특히 당분이 많은 음료는 유통기간이 얼마남지 않으면 그냥 설탕물처럼 되는데 이건 어르신들이나 활동량이 적은 장애인들에겐 당을 확 끌어 올리는 매개체가 되니 나눠드리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심은 완전히 생소한 느낌은 없고 우리나라 중소도시처럼 느껴졌다. 가로수가 좀 다르다는 정도? 넓지 않은 도로에 생각보다 많은 차량이 여기저기 정체되고 있었다. TV에서 보는 거와는 달리 오토바이보다 차량이 휠씬 많은데 한국과 좀 다른 모습은 꼬리 물기가 없다.

관광객이 많아서가 아니라 원래 사람들이 여유있고 느릿하다고 한다. 보기에는 여기저기 앞으로 옆으로 끼어드는 차량이 있는데 가이드는 경적 한번 울리지 않는다. 보는 내 속은 터지고. 근데 우리 차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다 그렇다. 표현은 못 했지만 "이 사람들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봤던가? 어디서 들었던가? 기억은 정확하진 않지만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차는 많으니 조급해지는 한국과는 달리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일수록 운전자들이 여유롭다고 하던데 이곳도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편견일지 모르지만) 워낙 기후가 온후해서 그런지 당최 급한 게 없고 느릿하다.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운전하면 속 터지겠다고 했더니 미미가 그런다. 출국 전에 국제면허를 발급받아서 렌트 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긴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사고가 빈번하게 난다고 한다.

특히 도로가 넓지 않고 회전식 교차로가 많아서 현지 도로에 익숙하지 않으면 사고 확률이 높으니 택시나 그랩을 이용하는 게 좋다고 한다. 동생 왈(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왕이 있다고 한다. 영국이나 일본을 보면 그렇기도 한거 같고.

제셀톤 포인트의 선착장, 휠체어가 다니기 불편함이 없지만 배를 타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 살짝 위험했다. ⓒ정민권

선착장은 넓고 깔끔했다. 입구에서 길을 따라 상점들이 있어 간단한 쇼핑도 가능하다. 입구에서 인원수에 맞게 구명조끼를 나눠 주는데 깨끗하진 않다.

배를 타려면 나무로 된 경사로를 내려가야 하는데 경사가 높은 편이라서 휠체어는 잡고 내려가야 한다. 목재로 된 경사로와 선착장 바닥은 휠체어로 가기에는 매끈하진 않았다. 휠체어를 탄 채로 쾌속정을 탈수 있는 건 아니어서 배 앞에서 어찌 탈까 당황해하는데 직원이 웃으며 다가온다.

그리고 친절하게 휠체어를 통째로 들어 올리려 했다. 고작 두 명이, 그것도 내가 앉아 있는 채로. 다시 한번 "진짜 이 사람들 뭐지?"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웃으며 그렇지만 아주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제지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콩글리시를 쏟아 냈다. 아이 부끄러워라.

갈 때가 아니고 돌아 올때, 갈때 배는 입구가 따로 없어서 고생했더니 다른 배로 데리러 왔다. ⓒ정민권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 엄청 무거워. 니들 둘이서는 턱도 없어." 라는 의미를 담아 "노! 노! 아이 베리 베리 해비!!"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하며 들어 보더니 쿨하게 포기한다. 쫘식들. 결국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직원 두 명과 동생 두 명이 들고 돌리고 하면서 겨우겨우 태웠다. 앞으로는 여행 전에 살부터 빼는 게 좋겠다고 진심으로 다짐했다.

정말 그림 같은 곳이었다. 우기였는데도 비는 한 방울도 안 오고. ⓒ정민권

나는 극도 예민함을 탑재한 덕에 크루즈를 타고도 뱃멀미로 기절하는지라 출발에 앞서 내심 걱정이 됐다.

한데 낡아 보이고 심지어 위험해 보이는 쾌속정을 탄 데다가 얘가 엄청난 속도로 물수제비뜨듯 물 위를 떠서 달리니 멀미는 싹 가셨다.

얼마나 달렸을까. 달리는 속도에 비례해 몰아치는 바다 바람을 얼굴로 정통으로 맞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섬에 도착했다.

섬에는 따로 숙소는 없고 식당과 샤워장이 있는데 선착장까지는 나무로 되어 있어서 휠체어도 갈 수는 있지만 혼자 다니기엔 쉽지 않다. ⓒ정민권

정오에 가까워지자 정수리가 벗겨질 듯 뜨거운 태양이 위용을 자랑한다. 나는 목이 부러지면서 옵션으로 땀샘이 없어진지라 이렇게 타들어가는 땡볕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강인함을 보인다. 한데 1초 만에 더위를 먹을 수 있다는 건 더블 옵션!

해변 나무에 세계 주요 도시 방향 표시가 되어있다. 한국 사람들이 많아선지 서울도 있길래 목숨걸고 일어섰다. 생각으로는 손으로 가르키고 싶었지만 중심잡는 게 만만치 않은터라 생존을 위해 참고 나무를 붙들었다. 아무튼 서울까지 3,565km 떨어져있다니. 멀긴 멀군.

가족들은 파랗다 못한 옥빛인 바다에서 스노클링 하는 동안 난 사방이 뚫린 자연친화적인 식당에서 습하고 텁텁함을 고상함으로 대처하며 책을 읽는다. 근데 기묘한 점은 이리 뜨겁고 습한 날씨인데 제주도의 한 여름보다 버티기 수월하다는 거다.

이런 날이면 한국에서는 더위 먹고 쓰러져 있는 게 다반사인데 여기선 버틸만했다. 미미의 말에 따르면 연평균 기온이 27~28도를 유지하는 여름만 있는 나라지만 많이 습하지 않아 살기는 좋다고 했다. 본인도 여행 왔다가 눌러 앉았다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덥긴하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 해변과 바다는 아이들이 놀기 좋다. ⓒ정민권

정오가 되자 베일에 싸였던 현지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뷔페식으로 음식들이 순식간에 차려졌는데 사람들은 접시를 들고 망설였다. 분명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맛도 생긴 것도 오묘한 것들의 향연. 음식을 가리지 않는 식신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처럼 낯선 음식에 용기를 잃고 입 짧은 사람들은 익숙한 바나와 파인애플, 정체 모를 치킨만 먹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음료인 듯 음료 아닌 음료를 마셨다. 솔직히 음료라고 하기엔 너무 미안한 그냥 밍밍한 물을.

혼자 멀뚱거리는 나를 보고 미미와 현지 직원들이 스노클링을 해볼 것을 권유했지만 백세 시대 아직 50년은 거뜬해야 하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스노클링은 너무 해보고 싶지만 그래도 그건 좀 더 안전에 민감한 나라에서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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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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