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 영어마을에서 열린 영 챌린저 포럼에서 앨리슨 래퍼씨. <에이블뉴스>

*이 글은 28일 오후 2시 경기도 파주 영어마을에서 열린 영 챌린저 포럼 앨리슨 래퍼 파주 강연 전문입니다.

잘 안 들리나요? 크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괜찮나요?

저는 오늘 제 인생과 살아가면서 직면한 도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사진에서 보시는 것은 제가 갓난아기일 때의 모습입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기형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의사들은 제가 태어나도 곧 죽을 거라고 저의 어머니께 말씀드렸었지요. 그래서 제 어머니는 저를 낳자마자 보지도 않고 곧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의 손에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수두에 걸려 고생을 했죠. 태어난 지 6주 후 저는 노인요양원에서 양육되었습니다.

저는 1965년 태어났는데 그때는 영국의 혁명기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치란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보수적이고 편견이 심했습니다. 장애인 아기에 대한 편견도 심했죠.

어쨌든 그때 태어난 세대로서 장애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이렇게 있는 것은 하나의 기쁨입니다.

양육원 시절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제가 양육원에 있을 때에는 누구도 저를 안아주려 하거나 위로해 주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들조차도 우리들이 울 때만 안아주고 어떠한 위로나 위안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방식과 잘못된 편견이었죠. 하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얼마 못살고 열등한 존재라는 편견이 보편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죠.

장애인들, 특히 저와 같은 장애인들은 의족이나 의수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저 또한 의족과 의수를 달게 되었습니다.

현대는 그렇지 않지만 그 시대에서는 의족과 의수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또 가스를 사용한 방식의 의족의수라서 건강에도 굉장히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때의 기술력이 오늘과는 많이 뒤떨어지기 때문이죠. 정상적으로 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의사표현 또한 힘들었죠. 의족, 의수 수술을 의사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은 거죠. 사진에 보시면 제 어깨에 꿰맨 자국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의족과 의수를 걸 수 있도록 한쪽 팔을 완전히 절단한 수술이고 이 자국은 가슴에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상처가 정말 싫었지만 요새는 이런 상처가 사랑스럽습니다.

저만의 특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특히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고 정상적인 생각, 정상적인 의사표현을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제 대부분의 사진은 제가 어렸을 때의 사진인데, 전부 모두가 의료기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저는 제 소유의 유아시절 사진이 없습니다. 요양기관과 병원을 전전 하며 살았기 때문이죠.

제가 자라고 나서 저는 이런 사진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병원측에 요청해서 제 사진을 얻었습니다. 물론 돌려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저는 돌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렸을 때 의족 의수를 하고 찍은 제 사진은 제 어렸을 때의 모습이고 저만의 소유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제가 요양원에 있을 때 수잔나라는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 담당 간호사였는데 저는 그때 그녀를 거의 매일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제가 발이 불완전하여 걸어다닐 수 없었으므로 뒹굴어 다니다 시피해서 그녀를 쫓아다니며 항상 질문을 하고 묻고 대화를 했습니다.

몇 개월 뒤 그녀는 병원측에 나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제안을 했고, 저는 당황스러웠지만 정말 그러고 싶었고 저도 긍정의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병원측은 수락해 주었고 저는 그 간호사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건 3년만에 처음으로 바깥에 나온 것이었죠.

저는 아내와 두 자식을 가진 그녀의 오빠집에서 양육이 되었습니다. 4살 때 그 집에서 입양절차를 밟고 있는데 저의 어머니가 갑자기 그 입양절차에 대해서 반대를 했습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아마도 자식을 잘 돌보지 못한 어머니로서 죄의식 때문에 그랬거나, 또는 다른 예측은 입양절차를 중단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이익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저에게는 사랑을 주었던 수잔나의 오빠가족이 저에게는 정말 더 소중한 가족이었는데 말이죠.

그 가족안의 오빠, 언니 또 그들이 저를 안아주었을 때 저는 정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만나기 이전 그 누구도 저에게 이런 사랑을 준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또한 제가 그때 아직 어렸으므로 이런 과정에 대해서 저는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이유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죠.

그후 저는 버밍엄으로 옮겨졌습니다. 진짜 가족이었다고 해도 정말 생소했습니다. 저는 분명 그들의 딸이었지만 저는 마치 방문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기를 꺼려했었는데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은 것은 하나의 저주라고 여겨지는 통념이 있었나봐요. 그녀는 더욱이 저를 미혼모상태에서 낳았기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어머니는 제가 창피했을 겁니다. 정말 안좋은 일이었죠. 태어난 것 자체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6살 때 의족을 쓰지 않겠다고 한 뒤 벗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7살 때 보스톤 플레이스로 갔습니다. 그곳으로 떠나기 전 새로운 환경, 그리고 타인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일상적인 것 하나하나가 모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을 헤쳐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차차 배우기 시작한 게 점점 향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8세 때는 독립심과 자신감이 상당히 강해졌습니다.

대학에서 나는 장애인이었고 A급의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학문적이나 일상적인 것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사귈 수 있었습니다.

한 엔지니어를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어깨에 부착할 장치와 더불어 내가 몰 수 있는 자동차를 선물해주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은 곧 내가 독립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소유의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클린스마트라는 분이 저를 런던으로 옮겨 사는 것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런던에서 저는 미술대학에서 프리 파운데이션 코스를 들으며 친구도 사귀고 많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남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의 작품이 구족화가협회의 어떤 사람의 눈에 띄었고 그는 여기 저기에 나의 작품을 실어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나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프리파운데이션 코스를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기초코스를 듣기 위한 인터뷰를 봤어야 하는데 나는 당당한 자세로 성공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육체를 그려야겠다는 꿈이 있었고 한때 교수가 그런 나의 꿈에 조언해주었지만 나는 반박을 했습니다. 학위를 얻으면서 나는 아들 패리스를 임신했습니다. 그러나 패리스의 아빠는 떠났고, 이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낳을지 말지 고민했고 주위에서는 극구 만류했지만 결국 낳았지요. 임신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과 같았습니다.

내 아들은 장애인 어머니를 가졌다는 편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고 패리스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패리스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 아들로서 성숙하고 의젓하며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이런 시련을 잘 이겨내 왔습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패리스는 또 다른 나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인 내가 패리스를 기른다는 것 때문에 양육복지시설과 많은 트러블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사회로부터의 편견이나 장애인 어머니를 가졌다는 대중의 시선 같은 많은 험난한 언덕이 있을 테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0일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제 며칠이 지났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밝은 한국의 환대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많은 사랑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리플합시다]장애인 일자리 100,000개 과연 가능할까?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