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감팔각찻상 /청사초롱 홈에서

그런데 단것을 너무 많이 먹었던 탓인지 그만 위장병이 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시집간 큰누나 집을 찾아갔다. 배다른 누나였지만 아픈 동생이 불쌍해 보였던지 받아주었다. 누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든지 손수 산에 가서 약초를 캐다가 삶아 주었다.

그 때만 해도 어린 나이라 무슨 약초를 어떻게 삶아 주는 지도 모른 채 누나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약초의 효험인지 누나의 정성인지 한 달쯤 지나자 그렇게 쓰리고 아픈 던 배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병이 낳았으니 누나 집에 있을 수도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이리에 있는 판 공장(상 만드는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밤낮으로 일을 하다보니 자주 기침을 했고 늘상 피곤했다. 일이 힘들어서 그러려니 참고 견디며 감기가 참 오래도 간다 싶었더니 어느 날 기침을 하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병원에 갔더니 폐병이라고 했습니다." 폐결핵은 자각증상이 별로 없어서 본인이 알게 되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다. 폐결핵임을 알고나자 병의 진행은 빨라졌다. 기침을 하면 피가 한 사발씩이나 쏟아졌다. 병원에서도 결핵말기라며 가망이 없겠다고 했다. 사장은 공장을 그만두라고 했고 더 이상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죽어야 하나. 참으로 막막했다. 절망을 안고 서울 용산시장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큰 형님을 찾아갔다. 형님이 용산보건소로 데려갔다. 보건소에서 진찰을 하고 약을 받아 왔다.

형님집에서 얼마간 지나다가 만리동에 있는 판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보건소에는 한 달에 한번씩 갔는데 한번에 먹는 약이 한웅큼이나 되었다.

돌봐줄 사람 하나 없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다. 다리는 계속 아팠으나 어릴 때처럼 곪지는 않았다. 결핵 약을 꼭꼭 챙겨 먹으며 가나마이신 주사약을 사서 직접 놓았던 것이다. 일회용 주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주사기를 끓였다.

결핵에 좋다는 온갖 민간약도 손수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한지 일년쯤 지나자 보건소에서 결핵이 다 나았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 용산보건소를 다니느라 서울을 떠나지 못했는데 결핵이 다 나았다니 더 이상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던 해 부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아하 1979년이었군요.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판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판공장에 다니면서 우연히 만난 김00씨가 지금의 아내이다. 몇 년 후에는 아내도 같이 판공장에 다녔다. 아내는 정말 좋은 동반자이자 그의 치료사이기도 했다.

다리가 아플 때는 마이신 주사를 놓아주기도 하고, 온갖 민간약을 찾아서 달여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모아 두었던 돈과 얼마간의 빚을 얻어 강서구 강동동에다 판공장을 직접 차렸다.

판공장에서는 주로 작은 찻상 등을 칠하였다. 가끔 큰 교자상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주문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잘 나가지도 않았다. 갖가지 상은 목공소에서 만들어 온다. 예전에는 주로 옻칠을 했다.

옻, 대부분의 사람들은 옻을 칠의 원료나, 독이 있어 가까이 가면 안 되는 나무로만 알고 있겠지만 옻은 암이나 갖가지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약나무라고 한다. 칠장이들은 옻이 몸에 좋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생옻을 그냥 먹었단다.

“말통으로 생칠옻을 가져오면 생계란을 먹고 그 껍질에 옻을 담아 그대로 꼴깍 삼켰습니다.” 옻을 먹을 때 씹거나 하면 온 입안에 달라붙어 큰 일이 난다는데 멋모르고 따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옻칠 대신 카슈라는 화공약품을 썼다.

“상이 들어오면 초벌칠을 하고 하루 정도 말렸다가 뻬이빠(사포)로 닦고 두벌 칠을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대여섯번쯤 해야 상이 완성되었다. 상은 1만5천원에서부터 5만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아내와 같이 열심히 일하면 한달 수입이 200만원 정도는 되었다. 그 돈으로 집세 내고, 이자 갚고 약값하고 나면 겨우 먹고 살만했다.

윤정화씨의 삶은 (3)편에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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