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 홍미경 작가. 그녀에게 예술은 생존이자 숨구멍이었다.ⓒ에이블뉴스

“매일 매일 전쟁 같은 삶 속 예술은 생존이자 숨구멍이었습니다.”

지체장애를 가진 '애니홍아트비젼' 1인 기획자 홍미경 작가(57세, 여)는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평범함과 지루함을 거부한다. 헤엄치기 좋은 수영장이 아닌, 조금 벅차고 힘들어도 넓은 바다에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다는 그녀.

휠체어 위 낮은 시선에서 목을 빼고, 눈을 키우고, 귀를 쫑긋 세워 끊임없이 펜과 붓으로 세상에게 말을 건넨다. “안 되는 게 어딨어요. 와이 낫?”

서울 강서구에 있는 홍미경 작가의 자택. 인형 공예품과 작품들이 가득하다.ⓒ에이블뉴스

■어린 시절 만화책에 ‘푹’, 독특한 아이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홍미경 작가의 어린 시절은 ‘만화’를 빼놓을 수 없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만화책을 접하고 좋아했던 그는 닥치는 대로 보고, 닥치는 대로 그렸다. 따라 그려도 보고, 자신의 상상을 토대로 줄거리를 재구성했다.

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설명하는 수업 내용을 알기 쉽게 만화로 그려내기도 하고, 친구들의 연애편지까지 대필해줬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고, 편지와 함께 작은 그림 한 장을 그렸어요. 그 편지로 인해 실제 연인이 되고 하니,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어요. 심지어 1년 동안이나 편지를 써준 친구도 있었죠.”

교무실에서는 ‘독특한 아이’로 소문이 났다. 교실에서 망설임 없이 질문을 던지고, 진부한 첫사랑 얘기에 ‘지루하다’는 그에게 한 선생님은 “너는 일반적인 삶이 아닌, 예술가가 될 것 같다”고 했다. 홍 작가 또한 당차게 받아쳤다. “그건 제 꿈이기도 해요.”

■의료사고로 장애…“앞만 보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예술가로서의 여정은 어려웠다. 가정형편 때문에 쉽사리 예술에 다가서지 못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료사고로 인한 장애, 그리고 싱글맘이라는 편견 속에서 앞만보고 달려야 했다.

어릴 적부터 약했던 몸은 아이를 낳고 경제활동을 하며 점점 더 버거워졌고, 결국 척추염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2주면 나가서 활동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끝내 걷지 못했다.

“내 아이를 키우기 위해 걸어야 한다”면서 매일같이 재활실을 찾아 멍투성이가 될 때까지 다리를 질질 끌고, 걷고 또 걸었지만 기적은 없었다.

병원에서 쫓기듯 퇴원 후 절망한 순간, 천사같은 눈망울로 웃고 있는 '금쪽같은 내새끼'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아들에게 세수를 시켜주고, 밥을 먹여줘야지!”

그 길로 국립재활원에 들어가 2달간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진한 끝에, 누구의 도움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아들에게 샤워까지 시켜줄 수 있게 됐다. 이후 지인의 도움으로 임대아파트 입주도 성공했다.

“나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자식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입주 첫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죠.”

홍미경 작가의 ‘온라인 전시회-고리’(www.gorigallery.co.kr)가 열리고 있다.ⓒ에이블뉴스

■감춰놨던 '끼', 먹고살기 위해 펜을 들다

홍미경 작가가 예술계에 발을 디딘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독립에 성공한 후 한 남자와 어렵게 가정을 꾸렸지만, 3년도 채 되지 않아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는 주저앉아 울 수만은 없었다. 살기 위해 학창시절 포기했던 만화를 그리기 위해 펜을 들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감춰놨던 '끼'를 다시 꺼내게 된 것이다.

1998년, 기쁜우리복지관 한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 ‘만화창작반’에서 본격 작업을 시작했다. 큰 아이를 등교시킨 후, 갓난아이인 둘째를 품에 안고, 등에는 짐을 가득 실은 채 수동휠체어를 미친듯이 굴렸다. 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40분이나 걸려서야 복지관에 도착한 후, 밤 9시까지 정신없이 작업에 매진했다. 작업 중간중간 육아도 병행해야 했다.

“한 장에 1000원짜리 그림도 그려보고, 각종 채색작업도 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어요. 남들에게 폼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죠.”

1999년 ‘전국장애인만화페스티벌’ 대상까지 받게 된 그는 복지관 팀장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돌연 “자유롭고 싶다”면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다.

홍미경 작가에게 만화는 세상과의 소통이자 장애인권운동이었다.ⓒ에이블뉴스

■만화는 세상과의 소통, 그리고 ‘인권운동’

홍미경 작가는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의 재능을 펼쳤다. 재능기부로 수레바퀴선교회 잡지에 ‘굴렁쇠’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각종 단체 및 기업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쉴새없이 펜을 움직였다. 연세재활학교, 등양초등학교, 등명중학교에서 만화반 명예교사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그에게 만화는 세상과의 소통이자, 장애인권운동이었다. 만연한 장애여성의 가정폭력 실태를 알리고자 만화를 그리고, 행위 퍼포먼스를 통해 폭로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함께 해결하자고.

“나는 감동을 주고 싶지 않고,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전달해서 소통하는데 매개체가 되길 원했어요. 나에게 그림이요? 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고, 나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죠.”

현재 홍미경 작가는 애니홍아트비젼 1인 기획자이자 일러스트레이션, 카투니스트, 플루이드아트작가, 늘봄공방 대표로 활동하며, 인형공예, 핸드폰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크릴 푸어링’ 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물감들을 배합하고, 부어내는 손놀림에 따라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탄생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3년째 아크릴 포어링 작업 중인데,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소주잔을 통해 물방울을 표현하기도 하고. 나에게 핸디캡이 있지만, 자연스럽게 그에 따라 또 작품은 변하거든요. 내 손으로 작품을 완성해나갈 때 뿌듯하죠.”

'제42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에서 장려상과 특선을 수상한 홍미경 작가.ⓒ홍미경작가 제공

■장애인 최초 ‘현대미술대전’ 수상, “이제 시작”

홍미경 작가는 최근 새로운 꿈을 이뤘다. 사단법인 한국현대문화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제42회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에서 ‘심연’, ‘아우성’ 작품으로 각각 장려상과 특선을 수상한 것. 대회가 생긴 지 42년 만에 장애인 최초로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일 열린 시상식에 휠체어를 탄 그가 등장하자, 장내의 모든 시선이 꽂혔다고. “그동안 장애인이 출품한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시상대에도 계단이 있어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몰랐던 거예요.”

축하의 말을 전하는 입상자와 관계자들의 눈빛을 보며, 홍 작가는 “이제 열렸구나”라고 생각하며, 일반미술계에서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일반미술계에 장애인이 진출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스스로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었음을, 그리고 그 선을 과감히 넘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현대미술대전 신청서 어디에도 장애인 구분은 없어요. 스스로 우물을 만든 것이죠. 왜 시선을 넓히지 않았을까? 헤엄치기 좋은 곳에만 가지 말고, 벅차고 조금 힘들지라도 폭포수, 강물 모두 섞이는 바닷가로 나와 도전해야 합니다. 그 파도의 휩쓸림을 느끼고, 부딪혀보고 싶어요.”

홍 작가의 도전은 끝이 없다. 앞으로 일반미술계에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해외아티스트와의 콜라보, 또 ‘나인프리다’ 뮤지컬을 통해 배우로서의 입지도 굳힐 예정이다.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창작공간 마련도 작은 소망이다.

“저는 무엇을 할 때 한 번도 망설여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이거 하자’ 해서 내 길이 된 것뿐입니다. 아웃사이더라고요? 저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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