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인 가정폭력 사례를 설명하고 있는 여성들.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 전인옥 상임대표, 한국청각장애인여성회 홍정예 활동가.ⓒ에이블뉴스

지적장애인 A씨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20살 연상의 비장애인 남편을 만나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명의 자녀를 함께 양육했다.

하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 남편에게 신분증과 통장을 빼앗기고 하루 용돈 1만원만을 받아 생활비는 물론, 세 남매 양육비까지 충당해야 했다. 당연히 용돈은 매일 부족했고, 시어머니로부터 “바보 멍청이”, “쟤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언어폭력을 당했다.

심지어 남편은 3차례 A씨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A씨는 결혼을 후회하며 이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여자가 그 정도도 못 하냐!” 2급 지체장애인 B씨가 퇴근 후 집에 오면 다시 집안 일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도와주는 것도 거의 없고 자녀는 초등학생이라 너무 힘들지만 활동보조 시간이 모자라 방법도 없다.

시댁에서는 평소에 며느리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면서 명절이나 시댁행사에서는 여자가 그 정도도 못 하냐고 함부로 이야기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중도실명 후 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시각장애인 C씨는 점역‧교정사 3급 자격을 취득했으나 30세가 넘도록 직업을 갖지 못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 집을 나갈 이유가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활동보조인을 이용해 산책하고 싶었지만 이조차도 허락지 않았다. 오랜 기간 혼자 집에서 지내다보니 C씨는 5분을 채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주위에서 ‘장애여성인 딸을 키우는 훌륭한 아버지’로 존경 받고 있다.

청각장애인 D씨는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시어머니는 너희를 통해서는 말을 배울 수 없으니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안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오직 기저귀 빨고 청소하고 밥하고 밖을 나갔다 오는 것도 허락을 받았다. 헤어지겠다하니 자식 두고 어딜가냐며 일만 시켰다. 아마 밥하는 사람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2017년 여성장애인의 가족 폭력 현실은 70년대 비장애인 여성과 다를 바 없다. 여성장애인가정폭력상담소는 전국 1개소 뿐이다. 갈 곳이 없어 결국 또 다시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인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은 9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여성장애인 가정폭력 지원체계 마련을 위한 정책 포럼’을 개최, 전국 여성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이번 실태조사는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간 전국 17개 지역 여성장애인 432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대부분 중증장애인, 그리고 나이대는 50대, 40대가 과반수를 차지했다.

결혼 상태는 미혼이 33.9%, 초혼 34.4%로 비슷하며, 결혼기간은 31년 이상이 가장 많았다.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한국장애인개발원 서해정 부연구위원.ⓒ에이블뉴스

■57.4%가 경험…칼, 몽둥이 흉기 위협도=실태조사 결과, 57.4%가 가정폭력을 경험했다.

정서적 폭력(47.9%), 통제(43.1%), 성적 폭력(35.5%), 신체적 폭력(35.3%), 경제적 폭력(34.6%) 순이다. 특히 지적‧자폐성 장애가 정서적, 경제적, 성적 폭력에서 빈도가 높았다.

먼저 신체적 폭력을 경험했다는 35.3%의 수치는 지난해 전 국민 가정폭력 조사결과 3.3%와 비교할 때 약 10배 이상 심각했다.

구체적으로 ‘손바닥으로 뺨 또는 몸을 때렸다’는 응답이 15.7%, ‘사정없이 마구 때렸다’는 응답이 11.1%, ‘칼이나 몽둥이 등 흉기를 휘두르며 위협하거나 다치게 한다’는 응답이 8.6%로 전국민 대상 신체적 폭력보다 약 10% 더 심각했다.

장애와 관련된 욕, 소리지르기 등 언어적 폭력은 29.6%가 경험했다. 이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보다 약 3배 높은 수준이다.

성적 폭력에서는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받았거나 당했다’는 항목에 응답한 사람이 12.9%로 매우 높았다.

집안 행사로부터 배제시키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시키는 ‘통제’ 부분을 보면, ‘무시한다’가 23.2%, ‘집안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19.9% 순이다.

■10대부터 피해…무서워서 ‘꾹’=이런 가정폭력을 최초로 경험한 시기는 10대가 39.6%로 가장 높았으며, 20대 27.3%, 30대 17.1% 순으로,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는 배우자가 32.1%, 형제‧자매 10.7% 등으로, 배우자를 제외한 가족원으로부터 폭력이 60%가 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혼 후에도 친인척과 시부모, 식구들에게도 무시와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정폭력으로 61.5%가 공포심을 느끼고, 42.9%가 불안하고 우울함 등의 후유증을 느끼고 있지만 44.4%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서워서’, ‘창피해서’ 등의 재폭력과 주위 인식 때문에 대처가 어려웠다.

이들은 전문 상담소, 역할을 인지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장애인가정폭력 쉼터가 매우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은 9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여성장애인 가정폭력 지원체계 마련을 위한 정책 포럼’을 개최했다.ⓒ에이블뉴스

■“악순환 고리 끊자” 다양한 제언들=이날 토론회에서는 여성장애인의 가정폭력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한 다양한 의견이 제언됐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서해정 부연구위원은 “비장애인여성보다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장애여성의 가정폭력 용어,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여성장애인의 경우는 부부폭력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개념의 폭이 상당히 넓다”며 “단순히 여성의 폭력 문제가 아닌 인권침해 문제로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가정폭력 발생률이 10배 이상 높고 후유증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발달장애인, 청각장애인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정확히 측정도 어렵고 상담 받을 수 있는 곳도 없다”며 “후유증에 대한 적절한 치유방법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구여성장애인통합상담소 이상미 소장은 “여성장애인은 가정폭력을 당해도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또 다시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이는 악순환을 경험한다”며 “여성장애인가정폭력상담소는 1개소, 여성장애인통합상담소는 1개소, 장애인가정폭력보호시설은 3개소 뿐이다. 상담소 확대와 보호시설 확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장애여성네트워크 김효진 대표는 사전 예방의 중요성을 들었다.

김 대표는 “장애여성의 성인권 의식을 함양하고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성인권교육진흥원 설립이 필요하다”며 “진흥원을 통해 발달단계에 따라 성과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받을 수 있으며, 이후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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