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진행된 ‘여성장애인 모성권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본인의 임신과 출산, 양육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여성장애인이 정당한 권리로 보편적인 양육지원을 받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장애인창의문화예술연대 이은희 대표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22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개최한 ‘여성장애인 모성권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본인의 임신과 출산, 양육과정을 회상하며 이렇게 희망했다.

여성장애인이 임신을 하고 출산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장애유형에 따라 호흡하기, 대・소변보기 등 임신 전에도 힘들던 일들이 더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 전 복용하던 약물을 중단하거나 바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일부 여성장애인은 본인의 장애 또는 건강상태가 임신 전부터 악화되기도 한다. 출산에 임박해 병원을 찾아도 의사들이 지레 겁먹고 거부하기도 한다.

지체장애인인 이 대표는 2002년 임신을 하고 이듬해 출산해 건강한 여아를 낳았다. 아이는 잘 커서 고등학교 1학년이 됐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임신과 출산, 양육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 대표가 임신을 했던 2002년은 장애임신부를 위한 임신・출산 정보가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임신과 관련한 장애유형별 매뉴얼도 없었고 여성장애인 임신부를 관리하는 전문의사도 없었다.

임신・출산에 대해 피드백 해줄 선배 여성장애인도 없던 상황. 이 대표는 ‘산모와 아이가 먹어야 할 음식’이라는 책과 신앙심으로 9개월을 버텨 아이를 낳아야 했다.

더욱이 임신 5개월부터 시작된 입덧은 심해져 피를 토하는 상황까지 악화됐다. 병원에 입원 한 후 입덧을 완화하는 주사를 맞기 시작했지만 혹여나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 대표는 출산을 앞두고 퇴원해 집에 도착해 절망감을 느꼈다. 퇴원을 하고 막상 집에 오니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던 것이다. 지체장애인인데다 만삭인 장애임신부가 도움을 구할 곳은 별로 없었다.

당시는 2002년으로 활동지원서비스라든지, 기타 장애를 가진 임신부를 지원하는 제도정책은 전무했다. 지원이라고는 지역 장애인단체가 일주일에 1~2시간 지원하는 간병서비스 정도가 고작이었다.

친가나 외가 역시 사정이 맞지 않아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교회 사람들이 2인 1조로 조를 짜고 이 대표가 청하면 화장실로 옮겨주는식으로 화장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도움을 주면서 살고 싶었던 이 대표는 늘 도움을 구하는 처지가 됐고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출산을 했으나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제장애를 가진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친정어머니가 3개월 간 돌봐줬지만, 이후 양육은 오롯이 이 대표의 몫이 됐다.

당시 제도적으로 남자들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직장 눈치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굉장히 좋은) 직장에서 사직하고 서울에서 충남으로 내려와 1년간 함께 아이를 키웠다. 이후 남편은 자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장애를 가진 엄마로서)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았다. 남편은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 아내 입장에서 눈치가 보이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출산은 끝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장애를 가진 엄마들이 보편적 양육서비스를 받게 해달라는 100만인 서명이 광화문에서 진행되고 있다”면서 “투쟁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권리(행복권)가 보장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22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진행된 ‘여성장애인 모성권을 위한 심포지엄’ 전경.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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