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며칠 간 집을 비우셨다. 이때다 싶어 아침밥 대신 빵이나 라면을 먹었다. 날이면 날마다 퇴근길에 카페에 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늦은 밤 시원하면서 달콤한 스무디 한 모금과 함께 글을 쓰니 영감이 샘솟는 듯했다.

다른 이들에겐 평범한 일상이겠지만 나에겐 부모님이 안 계실 때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일탈이다. 혹시라도 내가 할아버지와 아빠처럼 젊은 시절부터 당뇨로 고생할까 봐 노심초사하시기 때문이다.

3일째가 되자 나는 게으름뱅이가 되고 만다. 이날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하지만 오전 11시가 돼서야 슬슬 자리에 일어났다. 라면을 끓이면서 '이러면 곤란한데'라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침식사를 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침부터 내 코끝을 자극해오는 고소한 밥 냄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늦잠을 자고 싶은 휴일에도 눈이 저절로 떠진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침 약을 챙겨 드셔야 하는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 동생들은 밥을 포기하고 잠을 선택한 지 오래다. 나도 아침밥을 먹고 다시 잠에 청하기는 한다. 온종일 침대를 뒹굴 거리며 휴대폰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부모님께서는 휴일 날 하루 종일 빈둥거려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데도 괜히 찔려서 방문을 슬며시 닫곤 한다. 누구에게도 부지런한 삶을 강요받지 않지만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즘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매스컴에 장애를 극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맨날 잠만 자려하지 말고, 너도 저 사람들처럼 노력 좀 해봐',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네가 그만큼 노력해야지'라고 종용 받는 것만 같다. 장애가 있다면 비장애인 보다 10배쯤 노력해야 한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이 뇌리에 박힌 모양이다.

아침 겸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 통제력이 부족한데도 혼자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혼자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생활용품점에서 예쁜 그릇을 보자마자 독립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나가 살아라 하시던 부모님께서는 예상과 다르게 독립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맛있게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쥐꼬리도 없고 빨래도, 청소도 엄마처럼 깔끔하게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는 걸 좋아한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뭐든 혼자 다 할 수 있는 그날까지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독립한 지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독립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본 적이 있었다. 벌써 3~4년은 더 된 일이다. 이때도 조금 더 있다가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혼자 살기엔 내가 돈을 너무 조금밖에 못 번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셨을 게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살 수 있을 때 돈을 모아놔야 하지 않을까?' , '혼자 살면 돈 나갈 일이 많을 텐데...' 귀가 얇은 나는 또다시 수긍하고 말았다.

몇 해 전, 동생이 왕복 3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을 줄여보고자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동생이 독립하고 나서도 부모님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월세와 공과금은 밀리지 않고 잘 내는지 걱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빨랫감이 줄었다며 홀가분해하셨다. 동생의 독립은 타 지역 발령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너무 부러웠다.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도보로 출퇴근하는 게 평소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지는 뭐, 뭐든지 잘하나' 하며 속으로 심통을 부렸더랬다.

요즘 1인 가구가 크게 늘어났다는 며칠 전 부모님의 대화에 내 독립 이야기를 은근슬쩍 끼어본 적이 있다.

"다들 혼자 사는데 나도 그럴까 봐"

"그래라, 집 구해서 나가 살면 좋지."

내가 30대 중반이 되자 부모님 생각이 바뀌셨나 보다. 언제고 끼고 살 순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아마 몇 년 만 더 지나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집 알아봐 줄 테니 제발 나가 살라고 등 떠미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결사반대다.

혼자 지내려 해도 한 달에 8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는 월세, 공과금, 식비를 빼면 남는 게 없을 것이다. 해마다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치솟는 물가 탓에 모아 놓은 돈을 아무리 아껴 써도 몇 년도 안돼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사회초년생부터 꾸준히 해온 저축은 꿈도 못 꿀 테다. 나도 남들처럼 하루 8시간은 일해서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싶다. 하지만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를 그만큼 일을 시켜 주는 곳은 찾기 힘들다.

남의 일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잘하지 않고 독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에는 세탁기 돌리는 법, 빨래방 이용방법 등에 대한 정보가 즐비하다. 편의점엔 1인 가구를 위한 반조리식품이 넘쳐난다. 냄비에 재료를 몽땅 쏟아붓고 팔팔 끓이기만 하면 한다.

그렇다면 요리 못하는 나도 지금 당장 집 나가 살아도 밥 굶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요리는 하다 보면 늘 거고, 한겨울 이불빨래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빨래방에 가면 되는 거고. 안 찾아봐서 그렇지 방세를 일부라도 지원 받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일정기간 주거 코치의 지원을 받으면 독립에 실패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거 코치란 독립한 발달장애인에게 가사, 개인위생, 금전관리 등을 혼자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람이다. 2017년에 서울시에서 발달장애인의 독립을 돕기 위해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나는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고 혼자만의 삶을 누리고 싶은 욕구가 크다. 독립 후 처음 몇 주간과 집주인과 의사소통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만 지원받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휴일이면 아침밥도 안 챙겨 먹고 한없이 이불을 파고드는 삶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분을 만났으면 좋겠다. 다들 그러고 산다던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제도가 있음에도 발달장애 당사자가 독립을 말하면 '빨래는 할 수 있니?' , '청소는 어떻게 하려고?', '뭐 먹고살래?'와 같은 걱정 어린 질문 공세를 받는다.

복지관에는 자립 전 준비를 위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부단한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걸로 안다. 언제일지 모를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휴일에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휴일이라고 늘어져 있지 말고, 창문 활짝 열고 방 청소도 하고!

어쩌면 비장애인보다 훨씬 많은 자립의 기술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발달장애 당사자분들이 자립의 완벽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독립하기 딱 좋은 시기가 존재하기나 한 걸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돼도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시설에서 살고 싶진 않다.

2007년 봄,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한 분야에 전문가로 우뚝 서기를 희망하며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 직업전문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처음엔 설레었다. '기숙사 생활은 어떨까?' , '내방처럼 꾸밀 수 있겠지?' , '1인실이었으면 좋겠지만 2인실까지는 양보해주지 뭐!'라고 여겼다. 배짱 좋은 생각이었다는 건 생활관에 들어서서야 깨달았다. 방보다 사람이 많았던 생활관, 그 누구도 방 하나를 독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입이 삐죽 튀어나오려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단체생활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통제는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신입생은 한 달간의 적응기간 동안 학교 캠퍼스 안에서만 머물려야 했다. 사방이 산 뿐이어서 그랬는지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었다. 집이 가까워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수업을 마치면 서틀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을 배웅하며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통학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집까지 가기 위해선 산 넘고 물 건너는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학교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거기다가 지하철도 타야 했다. 왕복 4시간 가까이 되는 길을 매일같이 통학할 생각을 하니 조금 답답하더라도 기숙사 생활이 낫다고 여겼다.

적응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언제든 외출도 가능했고 금요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생처음인 단체 생활은 내겐 고역이었다.

집에서는 나 혼자 방 하나를 독차지하는데 기숙사는 적게는 세명에서 많게는 여섯 명까지 같은 방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나중엔 친해져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입소 첫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한방에 모여 있으려니 앞날이 캄캄했다.

식사시간을 놓치면 밥을 먹지 못했다. 무엇보다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게 답답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점호는 더 싫었다. 각방을 돌며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시던 사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집에 갈 수 있는 날만 기다렸다. 점호도 없고 늦게 잘 수 있고 늦잠을 자더라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집이 좋았다. 한껏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내 집, 내 방이 좋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취업에 성공한 덕에 답답하기만 했던 단체 생활을 6개월 만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내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시설에 들어가게 된다면 아무리 잘 되어 있는 곳일지라도 기숙사 생활처럼 답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었지만 단체생활을 해본 나는 16년 지기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 나중에 가족과 떨어져서 살게 되면 같은 동네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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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 칼럼니스트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꾸준히 써왔다. 꼬꼬마시절에는 발달장애를 가진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증오하기 위해 글을 썼다. 지금은 그런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발달장애 당사자로 살아가는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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