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몇 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조금 더 성장해 있길 바라!”

항상 나를 걱정해 주시던 분이 계셨다. 언젠가 연락이 닿게 된다면 '저 많이 나아졌어요. 글쓰기 실력이 한 움큼 성장했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타인의 말을 허투루 넘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분의 조언대로 매일 1시간 동안 책 소리 내서 읽기를 6개월간 지속하였다. 덕분에 말하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무엇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글쓰기 실력을 선물 받았다.

“유리 씨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많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신 중이신 거세요?”

내가 한글을 막 뗀 시기에 그분을 뵙게 되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은 진작 출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고? 나보다 더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된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분은 나의 글쓰기 멘토로 계셔 주신 게 아니었다.

“내가 유리 씨를 좀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속뜻을 파악한 순간, 시 소리 내서 읽기, 아에이오우 입 운동 하기, 혀로 뻥튀기에 구멍 뚫기, 머리에 책 얹어놓고 넘어지지 않게 걷기, 젓가락으로 콩 집기와 같은 일들을 해본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 주신 부모님과 학창 시절의 특수학급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SNS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분이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게시물에는 '재활치료 받는 중이신가 보네요? 하루빨리 쾌유하셔서 일상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댓글 하나가 달렸다. 다행히 재활치료가 이니라 운동 중이고 이것은 일상이라는 당사자분의 재치 있는 답변 덕에 별 탈 없이 일단락된 것으로 기억한다.

지체장애 당사자가 운동 중인 사진에 쾌유를 바란다는 댓글을 남기신 분도 내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신 분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뉴스에선 아직도 '장애를 앓다.'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거기에 한술 보태 작년에 인기리에 종영된 한 드라마에서는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된 스토리가 그려졌다. 꽤 인기 있는 드라마였는데 그걸 본 많은 사람이 장애를 치료의 개념, 없애야 할 부정의 대상, 비정상으로 인식할까 봐 두렵다.

학교나 직장에서 '장애인식개선 교육'이 해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처음엔 나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영상만 틀어놓거나, 영상 대신 배포된 간이 교육자료는 보는 둥 마는 등 모두 자기 할 일 하기 바빠 보였다. 이런 광경을 수차례 목격하고 난 이후부터는 이와 같이 형식적인 교육으로는 세상이 바뀔 거라는 바람은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

2001년 봄, 엄마의 눈이 한동안 많이 슬퍼 보였다. 엄마는 이모와의 통화에서 "등급이 나오지 않길 바랬는데..."라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속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걸 어쩌나?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쉽지 않다던데...'

내가 노력하면 성인이 돼서 장애인등록증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20대 후반까지도 이런 생각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발음 연습을 부모님이나 선생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만 해서, 걷는 연습을 게을리해서, 손을 움직이는 활동을 아주 많이 하지 않아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건 줄 알았다. 공부를 게을리해서 수학 문제를 풀기 어려운 건 줄 알았다. '나는 노력으로 장애를 없앨 수 있는 초인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노력을 안 해서 극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장애는 극복할 수도 없고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수년 전에 한 자조모임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자조모임이란 공통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친목도 쌓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임이다.

"아직 장애는 자신의 힘이나 의학의 힘을 빌려 극복할 수 없어요. 만일 극복이 가능하다면 여기 모인 분들 모두 장애인이 아니라 환자가 되는 거예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엔 많이 사라진 추세이지만 미디어에서 이따금 보이는 제목 '장애를 극복한 사람'은 한마디로 장애를 없앴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극복의 신화를 이루어 냈다는 대중 매체 속 그분의 장애는 그대로였다.

자조모임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장애를 만드는 건 환경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휠체어 이용자가 계단이 많은 길을 가면 장애를 심하게 느끼고 평평한 길을 가면 장애가 있다는 걸 못 느끼게 된다고 한다. 개인에게 장애를 이겨내라고 하지 말고 장애가 있어도 장애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비장애인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네가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어떤 동화책에서는 휠체어나 보청기 같은 보장구를 안경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일화를 들어본 적이 있다. 안경을 쓰는 것과 휠체어를 타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하니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단다.

"휠체어는 안경처럼 어디로든 마음대로 못 다니잖아요.“

나 또한 휠체어를 안경에 비유하기엔 조금은 이른 듯하다. 가까운 미래에는 장애를 진단받아도 너무 좌절하지 말고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장애가 있건 없건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본다. 이런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휠체어는 안경과도 같다는 말에 고개를 강하게 끄덕일 테다.

누군가 또다시 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며 깊은 한숨을 쉰다면! 너는 노력하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안경을 벗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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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 칼럼니스트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꾸준히 써왔다. 꼬꼬마시절에는 발달장애를 가진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증오하기 위해 글을 썼다. 지금은 그런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발달장애 당사자로 살아가는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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