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인. 예쁘다.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차가운 늦가을이다. 3살 때 사고로 두 팔을 잃고 동양화에 전념한지 26년. 단국대 동양화과 교수로 돌아온 오순이 교수를 만났다. 인천서 천안. 도로 옆으로 울긋불긋 보이는 경치가 참 아름답다. 천안IC로 들어서면서 도착한 단국대. 전화를 했다.

“생각보다 먼저 도착했는데요. 어디로 갈까요.”

“네, 저희도 곧 도착해요. 대나무밭 있는 곳에서 만나요.”

잠시 후, 언덕 밑에서 걸어 올라오는 두 여자. 단번에 오순이 교수와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 다니는 언니다.

“어머, 교수님. 너무 반가워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사실 오늘 만난다고 할 때 잠도 못 잤어요.”

“왜요?”

“사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여자분들 인터뷰 해달라고 하면 잘 안해 주거든요. 호호호. 그래서 혹. 약속이 취소되는 것은 아닐까해서 조마조마 했거든요.”

그 말을 듣던 오 교수는 피식 웃는다. 오 교수는 3살 때 집 앞 기찻길 옆에서 놀다가 그만 넘어져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했다. 너무 어린나이에 벌어진 일이라 그때 기억이 많지 않다는 오 교수는 “생각이 나는 건 그때 당시 잘려나간 팔보다 나중에 퇴원해서 집 앞 빨랫줄에 항상 걸려있는 허연 붕대가 생각이 나요”라고 말한다.

“사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한쪽 팔은 살릴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때 당시 사고에 너무 경황들이 없다보니 의사도 그렇고 잘려나간 팔에만 신경을 썼데요. 잘려 나가지 않은 팔에는 신경을 안 쓴 거죠. 얼마 지나고 나서 잘려나간 팔보다 멀쩡해 보이는 팔이 더 아프고 통증이 심했어요. 검사를 해보니까 어깨뼈까지 모두 으스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두 팔 모두를 절단 할 수밖에 없었데요.”

오 교수의 얼굴에서 ‘그때 당시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한쪽 팔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엿볼 수 있었다.

얼마전 전시회를 열었던 단국대학교와 산동 예술대학의 국제미술교류전(한국일보갤러리).

그렇다면, 어린시절은 어떻게 보냈을까 무척 궁금했다. 친구들과는 어떻게 어울렸을까. 학교는 어떻게, 사춘기 때는, 슬럼프는 없었을까, 남자친구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 오 교수는 “그렇게 궁금해 할 것 없어요. 아이들이 손으로 뭘 배워 가는 것 처럼 전 5살 때부터 발로 모든 걸 배웠어요. 예를 들어 글 쓰는 거라던가 그림 그리는 것, 옆에 있는 작은 물건 집어 옮기는 것 정도는 내가 해요. 단지 옷 입고 먹을 때만 옆에서 부모님이나 언니가 도와주죠”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들어 갈 때는 힘들었다. 같이 장난치며 놀던 개구쟁이 친구들은 모두 입학통지서를 받고 입학을 했는데, 혼자 받지를 못했다. 언니와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니 장애인이기 때문에 일반 학교가 아닌 특수학교로 가라는 것이었다.

싫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특수학교에 가는 것이. 1년을 쉬면서 창밖에서 까치발을 디뎌가며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듣고, 수업 후 집으로 돌아오는 친구들과 배운 것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어머니와 언니가 학교에 가서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나도 책임을 못 진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그 다음해 입학을 할 수 있었다.

힘들게 들어가서일까, 팔 대신 두발로 생활해야 하는 오 교수는 모든 것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팔이 없기 때문에 못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방과 후 특별활동 시간에 남아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오 교수는 5학년 때 그녀의 소질을 알아본 미술선생님의 제안으로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처음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팔도 없는 애가 무슨 그림을 그리냐고 걱정들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오 교수는 그림을 통해 삶의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도 학교에 가기는 쉽지 않아 여기서도 각서를 쓰고 입학을 해야 했다. 전문적으로 동양화를 배우기 위해 동양화 화실을 찾아다녔으나 시골이라 그런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 하려고 하면 안 되고. 그렇게 그림에 갈망하던 사춘기소녀 오 교수는 고등학교 때 문인화를 하는 김구(호: 목원)선생님께 사사를 받고 본격적으로 그림 지도를 받았다.

붓의 사용이 자연스러워지고 선이 부드러워 질 때까지 수없이 화선지와 싸웠다. 발이 퉁퉁 붓고 허리가 끊어 질 정도로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이 1978년 한 TV방송에 소개되면서 당시 단국대 장충식 총장의 후원으로 1986년 단국대에 입학, 4년간의 학업 끝에 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미술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항저우(杭州)중국미술학원에 들어가 당당히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중국에서 공부할 때 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왜, 난 안될까. 왜, 난 이렇게 됐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잃어버린 부분이 되살아 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고민은 짧게 하면 할수록 좋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늘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큰언니(오순덕.48)가 “한번 더 해 봐라, 넌할 수 있어”라며 큰 힘을 줬기 때문에 방황하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마음먹었더니, 더 밝고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던ㄴ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지도하는 모습.

한국으로 돌아온 오 교수를 제일 반기는 것은 가족들뿐 아니라, 그림 지도를 해주었던 김구 선생님. “제일 기쁘다. 처음 배울 때 많이 힘들어하고 했는데, 쉬지 않고 항상 꾸준하게 열심히 배워서 여기가지 왔나보다”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오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 오(吳)나라 남종화의 대가였던 형호(形浩)의 화론(畵論)을 다 룬 ‘형호의 필법기(筆法記) 연구’라고 한다. 이 학위는 예술창작이론과 실기를 아우르는 중국 최초 의 박사학위란 점에서 의미가 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것과 장애인이라는 두 가지 차별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결실이어서 박수가 절로 쳐진다.

올 9월. 단국대 천안 캠퍼스 동양화과에서 학생들에게 ‘문인화’를 가르치고 있는 오 교수는 학교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힘이 되는 선생님이고 싶고, 학교에서 많이 배울 수 있게 잘 가르치고 잘 지내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그림에 관심 있는 장애인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싶다는 오 교수는 “뭔가 서로 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 안해도요”라고 말한다.

TV나 신문을 통해 장애를 이겨낸 사람들의 사연을 더러 보고 듣곤 하지만, 오 교수가 성장했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장애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일까. 장애를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오늘은 두 팔이 없이 발로 그림을 그려 온 오 교수의 도전적인 삶이 필자에게는 더욱 진한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 같다.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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