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와 그의 가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미담의 주인공을 찾아가서 집을 고쳐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었다. 소년소녀 가장의 이야기나 묵묵히 사회사업을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었는데, 그 중에는 장애인의 이야기도 많았다.

한번은 “수퍼맨 걷는 날”이란 ID를 쓰는 장애인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그 ID는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나 역시 걷는 날을 애타게 꿈꿔왔던 휠체어 장애인인 때문이리라.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는 꾸준한 재활치료 7년 만에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사가 최근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또, 미국에서는 불법으로 되어 있는 배아복제 방식의 치료를 받기 위해 영국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진짜로 수퍼맨 걷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약간의 설렘(?)도 생기곤 한다.

“수퍼맨 걷는 날”

그런데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걷는 날을 꿈꾸는 내 생각의 밑바닥에는, 걸을 수 있는 사람이 걷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정말 그럴까?)

또, 내가(장애인들이) 걷지 못하는 문제의 해결방식으로, 사회를 배리어 프리(barrier-free)하기에 앞서서, 나를(장애인을) 사회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이기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학적인 기술의 발달로 고액의 수술을 받아서 장애인들도 걸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고액의 수술비를 마련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는다고 한들, 이 사회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이세상의 한쪽에서는 수술의 성공으로 장애인들이 줄어드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고, 사회가 그대로인 채라면, 그들은 또다시 걷지 못함에서 오는 불편과 괴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수퍼맨을 걷게 하는 일은 수퍼맨 개인에게는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수퍼맨들이 존재하는 사회적으로 본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즉, 걷지 못하는 이유로 불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퍼맨 걷는 날”보다는

“수퍼맨 안 걸어도 되는 날”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이광원은 장애인 보조기구를 생산·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주)이지무브의 경영본부장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NGO보고서연대의 운영위원을 지냈고,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설립된 (재)행복한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 패러다임이 소개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 말 한국장애인자립생활연구회 회장 등의 활동을 통하여 초창기에 자립생활을 전파했던 1세대 자립생활 리더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장애인권리조약 한국추진연대’의 초안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 사무총장, 국회 정하균 의원 보좌관 등을 역임한 지체장애 1급의 척수장애인 당사자다. 필자는 칼럼을 통해 장애인당사자가 ‘권한을 가진, 장애인복지서비스의 소비자’라는 세계적인 흐름의 관점 아래 우리가 같이 공감하고 토론해야할 얘깃거리를 다뤄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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