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를 호모(homo)라고 한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하고, 직립보행을 하기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하며, 도구를 사용하기에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부르며, 유희를 즐기기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부른다.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만물의 영장임과 인간의 차별성을 설명하려고 한 용어들이지만, 사실 생각을 인간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직립 보행은 보다 차별적이기는 하지만 인간만이 직립보행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걷는 것은 인간이며, 절대로 기는 것을 생활화하지는 않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다. 동물 중의 일부도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새도 집을 짓고 원숭이도 돌을 사용한다. 유희 역시 강아지만 하여도 공을 가지고 논다. 예술 차원의 수준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유창한 언어를 사용한다거나, 학문의 체계를 갖고 있다거나, 화폐를 사용한다거나, 경제를 안다거나 예술 창작 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등이 인간만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기술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일으킨 것은 더욱 편리하고 풍성한 삶의 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인간은 결국 행복을 위해 도구가 필요했고 언어나 기술 등도 모두 도구이니 행복을 찾는 수단과 목적이 뚜렷한 동물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일은 직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이 많아서 바쁘다’, ‘집에 일이 생겨서’ 등의 말에서처럼 일은 사람이 해야 하는 과제이고 일을 가진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일이니 숨을 쉬는 것도 일이다. 일은 모두 소득의 수단으로 제도화하지 못했고 일에 대한 보상 수준의 합당성은 아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시험 중인 역사적 과정 중이지만, 미래에는 모든 일이 화폐 소득의 숫자로 표시될지도 모른다.

그 일은 노동이며, ‘가사노동’이란 말이 있듯이 사회적 역할 모두를 일로 연결하여 보상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다면 장애인도 모두 100퍼센트 소득 활동을 하는 경제인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장애를 정의하면 장애는 일을 직업으로 하여 소득을 얻기에 불리한 제도로 인하여 행복의 수단으로 일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장애복지 서비스를 좀더 사각지대 없이 잘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가 맞춤형과 개별화이다. 개별화는 미국 재활법에서는 반드시 문서화된 개별화 고용서비스와 교육서비스, 고용서비스를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과 장애인 등의 특수교육법에서만 규정하고 있어 장애인복지법에서는 개별화 또는 개인별 서비스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개인과 개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개인은 복수가 아닌 단수를 의미한다. 장애인연금을 주는 조건이 개인에게 지급되면 개인별이 된다. 연금을 집단으로 묶어서 단체에 주고 나눠주라고 하면 개인이 아닐 집단인 것이다. 개별은 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고려한 상황을 포함한 개념이다.

연령별, 생애주기별, 성별, 장애유형별 등 하늘의 별만큼 별별이란 말을 별별 군데에 다 사용하고 있다. 생애주기별은 연령별과 유사한 의미로 아동기, 학령기, 성인기, 노년기 등에 필요한 서비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필요한 서비스가 주기별이란 거창한 이름을 사용할 만큼 계획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동기 재활 서비스를 노년기애 제공하지는 않는다. 출산 서비스를 아동에게 제공하지는 않는다.

주기별 서비스 계획이란 거창한 무엇인가 체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서비스가 다양하게 제공되면 당연히 생애 주기별 또는 연령별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생애주기별 서비스 계획서를 작성해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쓸 말이 별로 없어진다.

성별 서비스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성별로 필요한 서비스는 자연적으로 당사자에 의해 선택된다. 정책발전 5개년 계획 등에 생애주기별이란 새로운 슬로건은 실속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생애주기별은 같은 부류끼리 묶어서 하나의 동일성으로 서비스가 제공되므로 모두 개인별과는 대치되는 개념으로 도매금으로 퉁치는 복지다.

맞춤형은 복지서비스는 개인의 욕구를 고려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러 가지 서비스 조건을 만들어 놓고 개인이 그 조건에 해당하는지 보는 것을 맞춤형으로 간주한다면 맞춤형은 사실 조건으로 예산에 맞추어 대상자를 솎아내는 역할이므로 진정한 맞춤형이 아니다.

종합조사표에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나열해 놓고 선택권을 주는 듯한 결정권을 당사자에게 부여하는 것 같지만, 결국 선택권은 평가와 사정자에게 있다. 신발을 기성제품이 아닌 규격화된 판매품에서 고르면서 사이즈를 자신의 것에 선택하는 것을 사이즈를 맞추었다고 하여 맞춤형이라 말하는 것이 현행 복지분야다.

노동분야에서는 맞춤형이란 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직업을 제공하도록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고용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맞춤형은 더욱 책임성 있게 실천되겠지만 사실 맞추어 줄 자원이 별로 없다. 해변 모래에서 금을 찾듯이 찾아보자는 것이다. 반드시 사금이 있다는 보장은 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맞춤형은 시대와 노동 현장에 장애인을 맞추는 것이다. 장애인이 노동경쟁력이 약하니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데, 많은 분야에 모든 기술을 익힐 시간이 없으니 딱 한 가지 기술을 가르쳐서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맞춤형이라 하여 인턴제를 실시하고 그것으로 땡 치고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도 맞춤형이다.

맞추려고 하였지만 맞추지 못한 것도 맞춤형이다. 옷을 맞추는 거처럼 개인의 특성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화살로 목표를 맞추듯 맞추어보는 것이다. 잘 안 맞아도 목표를 정한 것이니 맞춤형이다. 고용이 용이한 경증이 아닌 최중증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공단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거나 왜 공단은 특정 장애 유형에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느냐고 따지면 등장하는 것이 맞춤형이라고 하여 시범사업이 마련된다.

맞춤형은 그래도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 맞추었으니 보다 특성이나 환경을 고려하여 준비를 하였을 것이고, 엄선하였으니 내용도 심화되거나 엑기스로 했을 것이다. 필요 없는 것을 빼고 필요한 것을 강화하였으니 성공도는 높아진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 우체국 우편물 분리업무 맞춤형 일자리 사업 대상자 훈련이라고 하면 아주 구체적이다.

맞춤형의 옷은 성공도가 높아져서 늘 유리하고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옷을 맞추었는데, 체형이 변하거나 키가 자라 못 입게 되는 옷도 있다. 사회는 계속해서 변한다. 시장도 변하고 경기도 변하고, 기술도 변한다. 맞춤형은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맞춤형 훈련은 변화에 따라 평생 지속적으로 사후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홀로서기가 안 되는 것이 맞춤형이다. 맞춤형은 매년 취업과 실업을 반복해야 하고, 또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맞춤형 서비스를 보충해야 하니 일자리와 훈련원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맞춤형이 미국식이라면 핀란드식은 스스로 맞추어 가도록 기본 능력을 가르치는 방식이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맞춤형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맞춤형이라는 것이다.

핀란드가 현재 국민의 행복도가 최고이고, 소득도 최고 수준이며, 국가 안정도 최고다. 핀란드는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많은 조건과 국내에 미칠 변화와 국민의 반대를 고려하여 일부만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정말 대규모 수용을 한 나라다.

그것이 오히려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면서 사회적 자본이 되었다. 이민자들은 최소한 5개국을 능통하게 사용한다. 그러니 국제무역에서 얼마나 좋은 인재가 되겠는가! 핀란드는 다양성의 인정이란 점에서 장애인 고용도 수용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경쟁력이다.

다음으로 핀란드는 인내와 신뢰가 기본이다. 노키아가 문을 닫고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국민들은 참고 인내하며 견뎠다. 사회가 책임이라며 시위를 하거나 자책하거나 시대를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적 사건 하나하나에 서로 헐뜯고 여론을 조사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끈기가 인내가 아니라 질긴이란 의미가 되어버렸다. 인내의 한국 정서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핀란드의 신뢰란 국민은 정부를, 정부는 국민을 신뢰한다. 특별한 조건이나 의심 없이 실업자를 위한 지원 정책을 하였고, 도덕적 해이라든가 부정 사용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의심으로 행정적 손실과 시각지대에 대한 서비스 포기가 많다. 정부가 정말 장애인에게 신뢰하면서 두툼한 소득보장으로 연금을 지급하고, 실업 기간 동안 조건 없이 생활유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배신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 실업 수당으로 생활하는 장애인은 35%에 달한다. 그리고 취업 상태에 있는 장애인 중 장애인연금을 받는 사람은 불과 2.6%에 불과하다. 우리는 직업재활시설의 최저임금 적용제외제도 때문이라도 이런 결과를 만들지는 못한다.

핀란드 직업 교육은 잠재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의 맞춤형은 하지 않는다. 기본에 충실한 훈련을 시행한다. 그리고 고용 현장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지원서비스를 통해 적응에 안착하도록 돕는다. 장기간 안정된 일자리로 인해 스스로 변화에 적응하는 힘을 가지도록 만든다.

4차 산업 초기에 로봇의 등장은 단순노무자들의 일지리를 빼앗아갔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중간 관리직이나 분석, 관리직이나 전문직의 일자리를 하나씩 지워나가고 있다. 4차 산업이 인간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시장을 완전히 왜곡시켰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득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연금을 소득 수단으로 선택하여 대를 이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올가미를 씌워버렸다.

이런 환경 속에 장애인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 만든 맞춤형은 시한부다. 고용은 복지와 경제로 확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고용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생활 전반에 대한 지원체제로 시급히 전환해 나가야 한다.

공공이 만들 수 있는 보호고용으로 일자리와 전업 업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부의 보호라는 우산 아래 장애인은 모일 수밖에 없다. 개인이 일시적 일자리를 찾아 정부와 지자체의 장애인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특성 업종을 할당하여 그 일자리를 위임받아 관리 하는 전문기관을 두고 훈련과 일자리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중증장애인 일자리가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핀란드의 장애인 고용의 특징은 강력한 정부의 보호조치와 기본역량의 강화, 신뢰와 인내이다. 불편하여 더 많은 도구를 사용하는 모어 호모 파베르가 장애인이다. 더 많은 도구의 사용은 더 많은 일자리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지 결코 결여 되거나 부족한 능력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통해 인간다워졌음을 장애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학기술로 미래를 준비하는 한국에서 4차 산업에서 장애인의 자리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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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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