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istic people are individuals. We are not all maths geniuses or we don’t all like trains. I am hopeless with technology and much prefer painting. There is no ‘typical autistic’."(자폐인들은 모두가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자폐인들이 수학의 천재도 아니고 모두가 기차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자폐인인 나는 과학기술에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좋아한다. 세상에 ‘전형적인 자폐인’은 없다.)-Yenn Purkis

하교 시간, 친구들과 공놀이에 여념이 없는 벤을 보고 한 엄마가 말했다.

“정말 부러워요. 벤은 영어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니 얼마나 좋아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내 표정이 과연 어땠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폐 아동들의 말하기와 운동능력과 또래관계 맺기는 비자폐 아동들과는 차이가 있다.

가령, 그녀가 ‘말 잘한다’고 하는 발화 능력이 사회적 소통의 말하기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 드리볼과 슈팅을 잘한다고 해서 농구 경기를 잘하는 일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친구들 속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 또래 관계나 놀이의 질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벤을 통해 깨달았다.

본인의 아이는 말도 느리고, 운동도 좋아하지 않고, 친구도 거의 사귀지 못해서 걱정이라는 그녀는 내 대답에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벤은 자폐인이어서 비자폐인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기습적 한방, 어쩌면 그녀 또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황했을 터. ‘말로 표현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을 읽어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재 그녀의 부러움은 과거 나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들이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벤의 소통적 언어 능력을 끌어 올릴까’, ‘어떻게 친구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안전하게 연습하게 할 수 있을까’, ‘잘하는 운동이라도 있어야 남자 아이들 틈에서 덜 놀림 받고 덜 상처 받고 살 텐데’.

만약, 지금 벤이 또래 자폐인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자폐인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라면 이유는 하나다. 나는 ‘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고 일찍 받아들였고 엄마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벤이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도움과 자극을 주려 노력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의 평화가 쭉 이어질 거라고 섣부른 장담도 하지 않지만, 평화가 깨진다고 해서 나나 벤의 인생이 실패했거나 폭망했다고 절망하지도 않을 자세는 되어 있다. 인간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희망을 건져 올리기도 하는 존재란 걸 이미 경험했으니까.

‘애들이 다 그렇지’, ‘남자 애들이 좀 산만하고 발달이 느린데 뭘 걱정이냐’ 등과 같은 자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물론 그 당시엔 나도 몰랐다)이 본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훈수를 뒀었다) 내뱉는 달콤한 말들 대신 나의 직관을 믿었다는 사실이 벤의 엄마로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 여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벤을 비자폐인 아이들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채근하고 원망하며 벤의 사랑스러움과 재치와 몰입력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한심한 엄마로 살고 있을 터이다.

벤과 살아보니 자폐의 세계는 온통 무지/편견/차별/혐오로 겹겹이 싸여 있다는 사실을 자갈밭 속에 자갈이 채이는 일처럼 경험한다.

“벤이 어떻게 자폐인이야?”

“무슨 자폐인이 이렇게 말도 잘하고 똑똑해?”

“벤은 이상한 소리도 안내고 머리랑 손도 안 흔들잖아.”

공식적인 진단을 내리기 전에, ‘벤이 자폐인 같다’는 나의 말에 지인들이 한결같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했던 말들, 진단을 받은 후에 종종 듣는 “별로 자폐인 같아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가 자폐에 대한 지독한 무지와 편견과 차별과 혐오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한 수많은 자폐인들은 이미 ‘자폐인들의 아지트’라 일컬어지는 IT 분야뿐만 아니라, 교수, 과학자, 연구원, 자동차 정비, 예술가, 의사, 운전사, 교사, 코미디언, 상담사 등의 수많은 영역에서 종사한다.

더군다나 ‘별로 자폐인 같아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는 말은 나에게 실로 대단한 무례다. 왜냐면 이 말은 ‘비자폐인이 우월하다’는 전제하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말인데, 솔직히 나는 벤이 ‘다르게’ 재능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비자폐인보다 열등하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믿거나 말거나, 요새 나의 최고 기쁨이라면 자폐인으로서 건강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벤을 보는 일이다.

‘자폐인 같아 보이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폐인은 어떤 모습이고, 세상의 모든 자폐인은 단지 하나의 정형화된 모습일까? 자폐인을 보면 ‘와 자폐인이다’하고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일까, 정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제가 자폐인 남편과 아이와 살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 되나요? 누가 이들을 자폐인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나의 안내로 아이와 남편이 자폐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 지인이 이런 고백을 하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자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없으면 의사도, 교사도, 부모도 심지어는 당사자 본인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르고 평생을 사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최근 자폐성 장애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급증하는 호주에서 성인 자폐인, 특히 그동안 많이 드러나지 않았던 소녀들과 성인 여성 자폐인, 그리고 자녀의 진단 과정을 통해 부모까지 함께 진단을 받는 경우가 늘어나는 주된 이유다. 마흔이 되어서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은 후, 마침내 본인의 고유한 모습 그대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호주 로컬 친구는 말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만약 부모나 내가 만난 수많은 교사나 의사 중에 단 한명이라도 내가 자폐인이라고, 뭔가 고장 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어릴 때 말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의 말처럼 ‘사람들은 모두 편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돌이켜 보면 나 또한 벤을 만나기 전에는 발달장애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니,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편견의 가해자였음을 깊은 반성 속에서 깨달았다.

“엄마 눈엔 내가 바보로 보여?”

비자폐인 엄마와 자폐인 아들의 입장이 상시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조건에서 사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관성에 젖어 방심한 찰나, 비자폐인 엄마가 ‘권력’의 우위를 가져가려는 틈이 보이면 벤은 거침없이 치고 들어온다. 결국 ‘차이’는 누군가에게는 ‘차별’의 근거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강력한 ‘성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언제든 차별과 혐오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경각심을 일상적으로 일깨워 주는 아들, 타인의 표현되지 않은 아픔마저 읽어내라고 주문하는 그가 나에게로 왔다는 사실, 이 어찌 특권이 아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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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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