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며칠 전, 우리 아이는 조금은 파란만장했던 겨울방학을 마치고 유치원에 갔다. 뭐, 사실 종일반에 다니는 아이니, 이미 훨씬 짧은 방학을 마치고 유치원에 다니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공식적 개학은 개학이다.

개학이 다가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바로, 방.학.숙.제.

대부분의 엄마 아빠들도,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방학이 끝나가는 주말부터 스트레스 팍팍 받으며, 심한 경우에는, 울면서 밀린 일기나 방학숙제를 했던 흑역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부부만 그런가?^^)

남편 왈, 자기는 2월생이라 현재 이응이 나이인 7세 때엔 이미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저 나이 때, 방학숙제를 밀리지 않고 성실히 여유롭게 마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자신도 울면서 밀린 일기를 쓰고 숙제를 마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단다.

나의 경우에는, 한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EBS 라디오에서 당시 초등학생들의 방학과제 책이었던 ‘탐구생활’ 활동을 돕는 방송까지 들으며 열심히 하얀 종이에 투명한 액체를 만들어 바른 후에 가열하면 글씨가 나타나는 실험도 하고, 초를 녹여 색깔초를 만들어 미술작품도 만드는 등, 가열차게 자기주도적으로(?^^) 숙제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초등 그 언젠가의 여름방학에는, 너무너무 숙제가 하기 싫어서 결국 일기를 대량으로 밀리는 바람에, 인터넷도 없었던 당시에 131 일기예보 안내까지 동원해 가며 처절하게 밀린 일기를 썼던 흑역사가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다.

그렇다면, 비록, 유치원생이기는 하지만, 방학도 끝나가는 주말, 이응이의 겨울방학 숙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겨울방학, 아이의 숙제는 그림일기와, 방학동안 이루거나 발전시키고 싶은 계획에 대한 실행 보고였다. ⓒ은진슬

이번 겨울방학, 이응이의 숙제는, 초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유치원에서 스텝 바이 스텝으로 배워 나갈 수 있도록 제작한 그림일기를 20일 정도 쓰는 것과, 초등 입학을 앞둔 내가 방학 동안 이루거나 발전시키고 싶은 일 두 세 가지 정도를 정하여, 계획하고 실행한 후, 그 과정과 결과를 그림이나 작품, 글쓰기 등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림일기야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만큼, 7세 아이들이 미리 접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다른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일반적으로 많이 하는 과제라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런데, 철저하게 자기주도적으로 겨울방학에 해내고 싶은 일 두 가지를 정하고, 계획하여 실행한 후, 평가까지 하라는 숙제의 경우, 무슨 유치원이 7세 아이들에게 이런 것 까지 시키냐는 느낌을 받을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굳이 유치원 과제가 아니었다면, 7세 아이에게 일부러 엄마가 이런 일을 만들어 실천하게 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여름방학 때 처음 해 보고는, 제법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했기에,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아이와 함께 했다.

아이는 피아노를 배워 <상어 가족>을 두 손으로 치는 일을 실천해보고 싶어했다. ⓒ은진슬

방학식날 숙제를 보자마자, 아이와 즉시 이 숙제부터 시작했다.

아이에게, 지난 여름방학엔 종이접기를 매일 꾸준히 해서 학 접기까지 해냈고, 아빠와 수학공부 매일 10분씩 하기를 정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는데, 이번 방학에는 초등학교 가게 될 형님으로서 어떤 일을 실천해 보고 싶냐고 물었다.

아이는 내심 생각했던 것이 있었는지, 의외로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엄마한테 피아노를 배워서 <상어가족>을 두 손으로 치고 싶어.’

‘진짜로?’

(오예! 바로 그거야.)

사실, 아이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마구 울려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비록 현역 프로는 아니어도), 강의를 하다 보면, 작은 연주 요청이나 교양음악 수준의 강의를 할 기회도 가끔 생기다 보니, 가열차게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우리 아들은, 엄마가 아무리 멋진 곡을 그럴싸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아도, 얘가 내 아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피아노에 저어어어어어언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클래식 곡들은 그렇다 쳐도, 로보카폴리나 터닝메카드 등의 노래를 TV 원곡처럼 멋지고 신나게 쳐 주면 뭔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콸콸 솟아나야 할 것 같은데도, 이건 뭐, 전혀 남의 일, 관심 밖이었던 것.

6세 정도 되니, 여기 저기 피아노나 악기를 배우는 애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 역시, 음악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선물 같은 존재인지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아이에게 접하게 하고픈 사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차마,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거나 반하는 결정을 하지는 않기에, 그저 때만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내가 쾌재를 부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 달 남짓한 방학 동안, 아이가 두 손으로 상어가족을 칠 가능성은, 내 아이가 피아노 천재라서, 소위 ‘그냥 되는 아이’가 아닌 한, 거의 없기에, 아이를 도와 최대한 실현 가능하고 부담도 되지 않을 정도의 목표로 수정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렇게 정해진 첫 번째 활동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피아노로 치기 위해, 피아노건반 이름 익히고 좋아하는 노래 1곡 이상 연주하기.’

이응이의 두 번째 활동은, 영어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배우기였다. ⓒ은진슬

‘자! 그럼 두 번째 활동은 뭐로 정하고 싶어?’

응, 나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랑 야구팀 이름도 잘 읽고, 기차표나 영화관 자리도 잘 찾고 싶어서 알파벳 대문자랑 소문자 배우기 하고 싶어.’

사실, 두 번째 활동을 정하는 아이의 생각을 듣고는, 조금 놀랐다.

엄마로서 아이가 무언가 공부 될 만한 걸 하겠다는 게 좋아서라기 보다, 무얼 하고 싶은지, 그걸 하고자 하는 목표와 이유 자체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명쾌하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도치맘 모드 들어간 건가?^^)

일곱 살의 은진슬 어린이는, 적어도 저토록 자기 생각과 의사가 분명한 아이는 전혀 아니었다. 우리 엄마도, 나도, 아이에게 똑같이 뭔가를 강요하거나 억지로 시키지는 않았지만, 나의 경우, 피아노가 좋아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언니가 치는 소나티네 소나타 같은 걸 배운 적도 없는 내가 자꾸 두 손으로 따라 치니까, 신기했던 엄마가 언니 선생님께 나를 보이면서,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생각도 없이 몇 년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피아노를 쳐왔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응이는 지금 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부분은 나를 닮지 않았다.

내가, 몇 개의 옵션을 제시하면서 아이에게 다음 날 아침에 무얼 먹고 싶은지까지 물을 정도로 워낙 아이 의견을 잘 묻는 성향이기도 했지만, 이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기질 역시, 굉장히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었다.

서, 너살 때에도, 내가 없을 때, 행여나 이모님께서 살살 꼬드겨 노는 척 하면서 뭔가 공부 비슷한 거라도 가르치려 들면, 자기가 낚였다 여기며 불쾌한 내색을 하며 하기 싫다는 의사 표시를 명확히 하였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은 후엔, 이모께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부탁 드렸을 정도였다.

반면, 자기가 하고 싶다고 명확히 표현한 일에 대해서는, 엄청난 일관성을 보이며 제법 열심히 하는 성향을 보였다.

옷 입는 것 역시, 3세 때부터 자기가 입고 싶은 걸 분명히 요구해서, 내가 코디해서 입힌 일도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쇼핑도 아이 의견을 존중하며 될 수 있으면 함께 한다.

사실, 이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때로는, 미국 같은 곳에서는 환영 받을 만한 성향의 아이겠지만, 순종적이며 주류에 조용히 잘 녹아들줄 아는 사람을 선호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일까 고민도 좀 있긴 하다. 그래도, 일단, 스스로 동기를 갖고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 하는 모습에, 그저 이 아이의 그릇대로 키우고자 마음을 가다듬을 뿐이다.

실천하기 파트. ⓒ은진슬

아이의 명확한 동기와 목표가 설정되어, ‘계획하기’가 끝났으니, 이제, 이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엄마 아빠가 방학 동안 도와야 한다.

‘실천하기’ 파트다.

우리 부부는 하나씩 역할을 분담했다.

남편이 아이와 하루에 한 장씩 알파벳 배우기 책을 함께 해 주기로 했고, 나는 하루에 10분 내로 아이와 피아노의 기본에 대해 함께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굳이 피아노를 ‘가르치다’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가르친다는 프로의 마음가짐으로 내 아이를 대하면, 아이가 내 기대를 따라오지 못할 때 실망하거나, 가르친다는 목표에만 사로잡혀 아이와 즐기지 못하고, 자칫 아이의 마음도 잃고, 피아노를 가르쳐 보겠다는 소기의 목표 달성에도 실패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알파벳 책으로 함께 공부한 아이. ⓒ은진슬

남편은 서점에서 적당한 유아영어 알파벳 책을 사가지고 와서 매일 한 장씩 아이와 함께 했다.

비록,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성향상, 가끔은, 알파벳 자체를 쓰는 것보다 연관 단어 그림을 컬러링 하는 것에 너무 빠지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꾸준히 재미있게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에게 피아노에 대한 동기와 흥미유발을 위해 앱을 사용하였다. ⓒ은진슬

사실, 나는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기대가 없었다. 여아도 아니고, 활동성이 매우 높으며 즉흥성도 강한 7세 남아를, 그것도 그 아들의 엄마가 과연 속 안 터지고 함께 잘 즐길 수 있을지 걱정과 회의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내 아들이 일단 하고 싶다고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 최대한 재미있게 즐겨보자가 내 모토가 되어야 했다.

전공자로서 생기는 잘 가르치고 싶은 여러 가지 간섭들(이를테면, 운지법, 손모양 같은 것들)은 다 무시하고, 무조건 피아노 배우기를 흥미롭고 신나며 성취감 느껴지는 일로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려서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워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어느 정도 자유롭게 건반이름을 알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좋아하는 노래의 멜로디라도 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도무지 뭘 배우는 건지, 뭐가 재미있는 건지, 아이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알겠지만, 도대체 바이엘의 ‘도래도래, 도래미도래미’ 따위를 반복해서 치는 행위가 아이들에게 어떤 흥미를 유발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아이에게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바라보고 쫓아가고 싶은 좀 더 현실적인 목표가 있어야 했다. 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동기나 성취감의 원천은, 내 손으로 평소 좋아하던 곡이나 유명한 곡을 연주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만족감과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본 끝에, 난 아이와 처음으로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여 피아노 건반을 익히는 활동을 함께 해 보기로 했다. 물론, 주가 되는 활동은 피아노 건반으로 위치랑 이름, 손가락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피아노에 대한 동기부여와 흥미 유발을 위해, 아이가 앱을 사용하여, 앱이 제시하는 대로 게임 하듯 건반을 터치하다 보면, 평소 익숙하게 잘 아는 음악이 완성되는 과정을 함께 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떴다떴다 비행기, 환희의 송가, 험티덤티 등등…

아이는 역시 이런 음악들의 멜로디를 금방 알아채고 반응했고, 먼저 말해 주지 않았어도 ‘환희의 송가’를 앱으로 게임처럼 연주해 보고는, 유치원에서 하는 코앤코뮤직에서 배웠는데 이 곡 들으면 신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 좋다며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야호! 성공이다!)

이후부터는 모든 과정이 수월했다. 아이는 자기가 연습하면, 아기 때부터 들었던 비행기나 험티덤티 같은 노래를 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앱보다 재미 없는 피아노로 하는 기본 손가락 연습도 잘 따라와 주었다.

물론, 나 역시, 아이가 지루해 하거나 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10분 내에 손가락 연습을 마치는 것을 철저히 지켰다.

주말에는 앱 사용 시간을 30분 정도 허락하여, 하고 싶은 노래나 건반위치를 충분히 파악하며 놀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아이에게 지금껏 스마트폰을 주지 않았던 우리 부부에게는 매우 큰 모험이었지만, 아이는 그 간 잘 들여 놓은 습관 덕분에 약속도 잘 지키고, 스마트폰에 빠져 들지도 않았다. 또한, 아이에게 음료수를 줄 때나, 고무줄 같은 걸 사용할 일이 있을 때도, 컵을 가득 채워 마시기 전의 음과, 조금씩 마시고 난 이후의 음의 피치 변화나, 고무줄 길이를 느리고 줄임에 따라 변화하는 음높이도 함께 체험해 보고, 피아노로 소리도 확인해 보며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했다.

방학동안 수술을 하여 열흘정도 실천을 못해서 아이는 스스로에게 낮은 점수를 주었지만, 스스로 정한 활동들을 성실하게 진행한 아이에게 우리 부부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은진슬

이제 겨울방학 활동을 평가할 시간.

아이는 아빠와 알파벳도 열심히 쓰고, 엄마와 피아노도 열심히 쳤다. 알파벳은 ‘R’까지 익혔으며, 피아노는 ‘환희의 송가’와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등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전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이응이는 얼마 전, 편도 아데노이드 수술을 하여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회복 기간이 필요한 상황이라, 이 기간 동안은 실천하지 못했다. 아이는, 이 기간 동안 알파벳쓰기를 하지 못해 알파벳을 끝까지 못 익혔다는 것과, 피아노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잘 하지 못했다는 나름의 기준 때문인지, 자신에게 주는 실천 점수에 의외로, 81점을 주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나름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조금 실망하는 듯한 아이에게, 위에서 언급했던 우리의 방학숙제 벼락치기 흑역사까지 들추어 가면서 폭풍칭찬을 마구 퍼부어 주며, 98점의 점수를 주었다.

자신이 정한 목표의 결과에 무게를 더 주는 듯한 아이에게, 수술까지 하면서도, 앉아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회복되자마자 바로 그림일기도 쓰고, 너무도 열심히 성실하게 스스로 정한 활동들을 해낸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경험인지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이가 잠들고 남편이 하는 말이, 자기가 이응이 나이 때를 돌아봐도, 7세 아이가 방학 동안 꾸준히 성실하게 그림일기를 쓰고, 스스로 정한 활동을 해서 방학과제를 여유있게 마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며 칭찬을 했다.

사실, 나도 슬쩍 이 김에 숟가락을 좀 올려 보자면, 안 보이는 엄마가 매일 성실하게 그림일기를 체크하고 맞춤법 등을 봐 주는 일 등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에, 엄마의 성실성 역시 한 몫 했다고 생색을 살짝 내 본다.

며칠 전, 같은 나이 아이를 키우는 시각장애 엄마와도 통화를 했는데, 그 엄마도 아이의 그림일기를 도와주기 위해 함께 얘기하며 쓰지만, ‘아이가 쓴 결과물을 볼 수 없다 보니, 아이 ㅐ 썼니, 어이 ㅔ 썼니’ 물어 가며 하면서 너무 힘든 나머지, 자기가 마지막에 종이에 아이 일기 텍스트를 그대로 써서 보여 주면서, 이대로 잘 썼냐고 확인한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처절하고 치열한 엄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아이와 함께 한 유치원 겨울방학 숙제를 통해, 내가 확실히 한 번 더 깨닫고 다짐하는 것이 있다.

아이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동기는, 엄마의 유난한 욕심이나 유별난 정보력, 주체 못할 불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아이는 스스로 내적 동기와 목표를 설정했고, 그것을 스스로의 에너지와 의지로 이루어 냈다. 단언컨데, 나는 아이에게 어떤 강요도, 어떤 것을 하게끔 영향을 미친 적도 없다. 그저,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예민한 시선으로 쫓고, 함께 이야기 하면서 밖으로 끌어 낸 후,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잘 도달할 수 있도록 보조적으로 돕기만 했을 뿐이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일부를 외워서 연주하면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았을 것이며, 아빠랑 코코라는 영화를 보러 갔을 때, 스스로 알파벳을 읽고 자리를 찾을 수 있었음에 자신에 대한 신뢰와 유능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멋진 자기주도적 성취 경험은, 앞으로 아이가 살아갈 날들에 양질의 자양분이 되어줄 것임을 확신한다.

이번 칼럼에서 만큼은, 돌 날아 오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엄마로서 일곱 살 이응이의 멋진 방학숙제를 열렬히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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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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