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우 젊은 나이에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 지휘봉을 잡았다.

즐겁게 방송일을 하다가 36세 되던 해에 친구의 권유로 준비없이 현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처음부터 평직원이 아닌 시설장을 맡게 되면서 나보다 나이가 휠씬 더 많은 부하직원들과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50대 중반의 조리사, 40대 후반의 운전원, 40대중반의 위생원 등을 모시고 장애인 직업재활의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했었다.

그 중에서도 삿갓을 쓴 상일꾼이 아직도 가슴에 큰 고마움과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경기도 이천에 자리한 한마음일터는 중증장애인직업재활시설이여서 임가공과 단순 노무형태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제품을 조립해서 기업체로부터 받는 댓가가 너무 작아서 직원들이 기본업무와 함께 작업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고 신생시설이여서 축대를 쌓는 일, 나무를 심는 일, 그리고 각종 위험물 관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내가 무탈하게 직업재활시설을 경영할 수 있었던 데는 삿갓을 쓴 연상의 한 남자가 묵묵히 곁에서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어려운 작업을 헤쳐 나가며 몸을 아끼지 않고 바깥 일까지 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작업환경을 쾌적하게 조성해놓고 한낮에는 뙤약볕에서 축대를 쌓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쩌다 월매출액이 빈약하면 늦은 시간까지 혼자서 조립작업을 하며 장애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임금을 더 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젊은 나를 깍듯이 시설장으로 섬겼으며 내가 시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해 주는 신사 중에 신사였다.

불현 듯 그가 보고 싶어 저 멀리 전북 순창으로 뜨거운 여름을 헤치며 달렸다. 당시 삿갓을 쓰고 열심히 나를 도왔던 그 남자는 지난 2009년에 사재를 틀어 문닫은 초등학교를 매입해서 장애인 22명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척박하고 황량했던 폐교를 푸르고 아름다운 동산으로 가꿔 놓았으며, 시설 내부는 아늑한 가정처럼 아기자기하게 순수 다듬고 꾸며서 참으로 행복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법정 시설은 사실상 개인이 신고절차를 마치고 거의 자생적으로 운영을 하는 형태이기에 재정이나 수행인력이 늘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여느 국고보조금을 받아 운영하는 시설 못지 않게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과 장애인 각 개인에 대한 맞춤형 서비스체계를 튼실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15년 이상 시설장 직에 머물렀던 내가 매우 작아지는 느낌이었고, 내가 가진 이념이나 철학이 정말 초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디서 솟았는 지 진한 감동이 가슴에 가득 차 올랐다. 손재주가 좋아서 어지간한 물품이나 시설은 재제소에서 버린 목재들을 가져다가 뚝딱뚝딱 멋지게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조경을 꼼꼼하게 관리하여 마치 돈 많은 사람들의 정원처럼 근사하게 펼쳐놓았다.

전정석 원장이 버려진 목재를 이용하여 손수 만든 정자. ⓒ유석영

22명의 장애인들이 행복하게 꿈을 꾸는 법정 장애인거주시설 '로뎀나무' 전경. ⓒ유석영

오랜만에 그 남자와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함께 일했던 추억을 꺼내 보았다. 옛말에 '형만한 아우 없다더니' 역시 그 남자는 나의 형이었다. 나보다 10살이 더 많아 이제는 지칠 법도 하련만···.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 그의 꿈꾸는 계획들 속에서 장애인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음을 절절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철모르는 나에 비하면 그 남자는 결이 곱고 가슴이 넓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농촌에 사는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게 직업재활시설을 만들어 즐겁게 일하며 돈도 벌 수 있게 해야겠다는 그 남자의 생각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돈이 없어도, 환경이 어려워도, 적지 않은 고생이 이어질 것임에도 나이와 상관없이 복지를 실천하려는 그 의지가 격조 높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법정 시설에게 국가가 좀 더 관심을 가져주고 할 수만 있다면 뒷바라지를 더 많이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컸다. 맑은 유리창처럼 투명하고 푸른 나무처럼 생동감있게 살림을 살아가는 건강한 법정 시설에 힘있는 국가가 마음을 열어준다면 행복의 크기는 더욱 커져 갈텐데···.

나의 장애인 복지여정에 삿갓을 쓴 연상의 그 남자, 장애인거주시설 '로뎀나무'의 전정석 원장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을 복돋아주며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유석영 칼럼니스트
사회적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 향상, 선한 가치의 창출과 나눔을 이념으로 청각장애인들이 가진 고도의 집중력과 세밀한 손작업 능력을 바탕으로 질좋은 맞춤형 수제 구두를 생산하며, 장애 특성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여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