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윤(48)씨의 고향은 경남 사천이다. 아버지 박만수(작고)와 어머니 이계순(작고)의 3남 5녀, 8남매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하나 있었고 딸 많은 집의 둘째 아들이었기에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는데 세 살 때 소아마비가 덮쳤다. 그의 집은 아버지가 사천 비행장에 군속으로 근무한 덕분으로 길고 긴 병원순례가 가능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장애가 처음 발병했을 때 죽기 살기로 자식의 치료에 매달리게 마련인데 제일먼저 돈이 절단 난다. 빚을 얻고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부모님 심정이야 목숨이라도 내 놓고 싶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병원순례로 전국일주를 하다시피 했건마는 아이의 양다리는 축 늘어진 채로 힘을 잃었다.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김해 비행장으로 발령이 나서 부산 구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단합대회에서 부인과 함께 노래하는 박태윤씨. ⓒ이복남

구포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걸을 수가 없으니 큰누나 등에 업혀 다녔다. 3학년 때부터는 가까스로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병신 절름발이 등 친구들의 놀림으로 온갖 설움을 다 당했다. 그때마다 방패막이를 자처 해 주는 친구가 하나 있었으니 가방을 들어주고 대신 싸워 주고 비가 오는 날이면 업어 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그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고마운 친구 박정훈씨는 지금까지도 흉금을 터놓고 잘 지내는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중학교는 겨우 졸업을 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한 후라 가정형편도 여의치 않았지만 목발을 짚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가 근처에는 없었던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만원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것은 어림도 없어 보였다. 버스가 한가한 시간에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다보니 누군가가 괴정에 있는 야간 실업학교를 알려 주었다.

구포에서 버스를 타고 괴정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도 만만치 않은데다 어렵사리 졸업한 다해도 취업할 길도 없어 보여 2학년을 마치고는 그만두었다. 장애인복지가 태동 될 무렵이라 직업재활이란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고 그런 곳에 가면 공짜로 기술을 배울 수도 있다고 하던데 원 성질도 급하지, 중퇴 후 좌천동에 있는 시계학원 단기코스에 들어갔다.

동승택시 관리이사 시절의 박태윤씨. ⓒ이복남

어럽쇼. 졸업은 했는데 취업할 곳은 없었다. 시계방 같은 곳에서 기술을 배우려면 사환으로 들어가서 심부름 등 온갖 궂은일을 다 해야 하는데 걸음도 잘 못 걷는 목발 짚는 장애인을 누가 써 주겠는가 말이다. 시계학원 옆에 목조각을 하는 곳이 있어 이번에는 목조각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목조각이 주로 쓰이는 곳이 절이라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서 올라가서 조각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도 내가 할 일이 못 되는구나” 목조각을 포기하고 마침 아는 친구를 따라 충무(통영) 나전칠기 공장에 들어갔다.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잘 건조된 나무에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소라 전복 진주조개 등의 자개를 붙이고 가공하여 옻칠을 하는 공예품이다.

나전칠기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누는데 주름질과 꺼름질 그리고 칠부이다. 주름질은 나무에 본을 뜨고 자개를 실톱으로 자르고 숫돌에 갈아서 붙이는 작업을 하고 나면, 꺼름질 차례로 구름 물결 등 자잘한 문양을 붙이고 인두로 지져서 완성이 되면 칠부로 넘어가서 칠을 하는데 옻칠은 너무 비싸서 고급제품이 아니면 대부분은 카슈라는 화학 칠을 했다. 연마, 옻칠, 광내기 등 과정을 거쳐 마침내 오색영롱한 나전칠기가 완성되는데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는 보통 45가지 정도의 공정을 거치게 된다. 그는 꺼름질 담당이었고 3년을 부모 형제를 떠나 충무에서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부산으로 올라와서 구포에 나전칠기 공장을 차렸다. 공장은 제법 잘 되어 돈도 좀 벌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양가구가 나오기 시작했고 나전칠기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리고 말았다. 장사는 안 되고 마진도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공장을 접어야 했는데 문을 닫기 전에 운명의 만남이 있었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한 아가씨를 만난 것이다. 해남 아가씨였는데 집에서 반대할 것이 너무나 뻔 하므로 처가에 알리지도 않고 살림을 차렸다. 첫 애를 가지고 배가 불러 올 즈음 처가에서 부모님이 들이 닥쳤다. 그는 피신을 했고 이미 배가 남산만한 딸을 어찌 하겠는가.

부모님은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 첫딸을 낳고 1년쯤 지나니까 처가에서 같이 오라고 했다. 비로소 처가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정연희(42)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큰딸(고3)과 둘째딸(고1)이 있다. 박태윤씨 이야기는 [3]편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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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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