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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정말 타고 나는 것일까
뇌병변·신장중복장애 1급 김영탁 씨의 삶-①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8-07-11 17:37:22
“가야 할 곳이 있다

철로를 달렸던 건 기차와 석탄이 아니라
숨 가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던
과일 가득 담은 가방의 자크를 연신 열고 닫아 보듯
마음 설레던 점촌역

멀리 북으로 남으로 떠났던, 또 거기서 몰려왔던 사람들
누군가의 청춘이, 일생이 쓰러지고 일어서던 기차는,
뒤돌아 볼 수 없어 쉬었다 간다.

두 눈 속에 석탄 빛 불꽃이 일었던
가슴속 광부여 농부여,
상처받았지만 병들지 않아
떠나는 자가 입술 깨무는 곳

먼 데를 떠돌던 기차여

지금은, 영강 마주 안고
돈달산 어깨 위에 동이 틀 무렵
기적 울지 않아도 네가 온 줄 알겠다.

네 환한 이마가 우리의 꿈인 줄 알겠다.”


이 시는 문경에서 태어난 하재국 시인의 ‘점촌역’이다. 2009년 9월 경북 문경시와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에서는 점촌역 광장에 ‘점촌역’이라는 시비(詩碑)를 설치했다.

관광·예술의 도시 문경을 홍보하고 점촌역을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문경이 문화·예술의 도시란 점을 알리는 목적이란다. 필자는 점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재국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영탁 씨. ⓒ이복남
▲김영탁 씨. ⓒ이복남
철로를 달렸던 건 기차와 석탄이 아니라 숨 가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북으로 또는 남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등 그러는 가운데 누군가의 청춘이 어쩌면 일생이 쓰러지고 일어서면서 기차는 그렇게 점촌역을 거쳐 간 모양이다.

문경은 영남지역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산세가 아치형으로 둘러싸인 관계로 지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분지형 산악기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문경 그리고 점촌은 많이 아프고 애달픈 풍경일 뿐이다.

김영탁(1962년생) 씨는 경상북도 문경시 유곡동 한적골에서 태어났다. 3남 3녀의 둘째인데 위로 형이 하나 있었고 4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의 고향은 산동네였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사는 주로 어머니가 지었고 아버지는 산 너머 탄광에 다녔다. 고개 너머는 탄광촌이었고 땅만 파면 석탄이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끼야마라고 했습니다.”

사끼야마(さきやま)란 탄광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숙련 광부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선산부(先山夫)라고 한다.

“동발을 세우고 처음 들어가는 사람을 사끼야마라고 했습니다.”

동발이란 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나무 기둥 즉 일종의 버팀목이다. 갱도에 동발을 세워야 광부들이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곡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탄광촌에서 오는 애들은 새까맣게 표가 나여.”

고개 너머 안불정에서 오는 애들이 있었는데 남자나 여자나 코흘리개 시절이고 제대로 씻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탄가루가 묻어 전신이 까맸다는 것이다. 고개 너머에는 바깥불정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른 학교가 있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찔레꽃 산딸기 삐삐 같은 것도 먹고 개구리도 잡아먹고 묏등에서 칼싸움 같은 것도 하면서 놀았다. 어린 시절 김영탁 씨가 기억하는 유곡이나 점촌 등은 탄광촌이었다.

점촌역 시비. ⓒ문경시청 블로그
▲점촌역 시비. ⓒ문경시청 블로그
그러나 유곡역(幽谷驛)은 고려시대부터 상주도에 설치된 역참이다. 첫머리에 나온 ‘점촌역’은 기차가 다니는 역이고 유곡역은 고려시대부터 중앙정부에서 명을 받고 지방으로 그 명을 전하러 가는 관리들이 이용한 교통기관이다.

유곡역은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영남사람들이 한양 길에 오르면서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말이나 사람이 쉬어가는 곳으로 서울과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지역이 넓고 골이 깊숙하고 그윽한 골이라 해서 유곡이라고 칭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유곡역은 종6품 찰방이 관장했는데 현감과 같은 급이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 곽재우가 유곡찰방을 역임했고, 옛 유곡역 자리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선정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점촌(店村)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수공업을 전문으로 생산하던 마을을 의미한다. 점촌은 옹기, 유기. 철기 등 장인들이 생산하는 물품에 따라 옹기점, 유기점, 수철점 등의 형태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점촌으로 불리는 지역이 여러 군데 있다.

그러나 김영탁 씨가 기억하는 점촌은 광업소 내지 탄공장이 전부였다. 석탄광산이 활발하게 돌아갈 때는 기차역에 시커먼 저탄장도 있었고, 석탄을 실어 나르던 화물기차도 바쁘게 달리던 곳이었다.

“길도 시꺼멓고 도랑에도 전부 시꺼먼 물이 흘렀습니다.”

그 속에서 어머니는 농사를 짓고 아버지는 석탄을 캤다. 어머니는 콩을 심었고 고추농사를 많이 했는지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 갔다 오면 콩과 고추를 땄다고 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밭둑에 묶어 놓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대를 잇는 광부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탁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커서 공무원이 되거라.”

유곡역관. ⓒ문경시청 블로그
▲유곡역관. ⓒ문경시청 블로그
부모님은 펜대 잡는 공무원이 소원이었던 모양이다. 형이나 동생들도 부모님의 그런 소망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공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다른 장래 희망은 없었을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소원이 공무원이라는데 무슨 다른 꿈이 있겠어요.”

점촌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학교는 제법 먼 십리길 이었다. 아버지는 고개 넘어 광업소로 걸어 다녔으나 두 살 위의 형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전거를 한 대 샀다. 학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어서 형이 운전하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아서 갔다. 돌아 올 때는 형보다 수업을 일찍 마쳤으므로 하굣길은 친구들과 걸어 다녔다.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돈 벌러 가서 자전거는 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형은 대구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운전을 배워 현재도 고향에서 덤프트럭을 운전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전거를 독차지 하고 등굣길이나 하굣길을 신나게 달렸다. 그리고 문창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가끔은 영화도 보러 다녔고 술을 한 잔씩 하기도 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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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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