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을 보고, ‘대단하다’는 찬사와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요.

열세 살 때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마침내 주목받는 한복 디자이너가 된 집념의 주인공 이나경 씨. 그녀는 발가락에 바늘을 꼽고 왼손으로 실을 끼워야 했지만 ‘바늘과 가위를 잡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하는데요. 최근 데뷔 30년을 기념한 패션쇼를 개최해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녀는 연극, 무용, 오페라 등 무대 예술에서 자신의 한복을 배우들에게 입혀 왔는데요. 30년간 100여 편이나 되는 작품의 의상을 만들어서 한복의 멋을 세계에 알리고, 한복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한복은 그냥 옷이 아니라 세상과의 소통 수단이었다'고 고백하는 한복 디자이너 이나경 씨를 4월 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호기심에 빼앗긴 오른손, 한 팔의 미다스로 부활

▶ 지난 27일에 데뷔 30년 패션쇼를 개최하셨는데 독특한 형태의 패션쇼였다고요?

호텔이나 극장에서 하는 런웨이처럼 모델들이 죽 걸어갔다가 걸어오는 패션쇼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가까운 공간에서 패션쇼를 했어요. 1년에 3~4번씩 봄, 여름, 가을 패션쇼를 하기는 했는데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언론에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주위에 전문가들이 계셔서 무사히 끝난 거 같아요.

▶ 13살 때 사고로 한쪽 팔을 잃으셨어요?

저희들이 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어요. 그 시험이 12월에 있었고 학교는 3월에 가니까 그 동안은 놀았어요. 요즘 같으면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엄마들이 가만히 안 놔두겠죠. 12월 초에 시험을 보고 3월 전까지는 노니까 신나는 날인데 2월 설을 앞둔 며칠 전에 사고가 일어난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하는 걸 좋아해서 이모가 ‘하고집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어요. 뭐든지 하고 싶어 한다는 뜻으로요. 방앗간에 떡하러 간다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고 갔어요. 방앗간에 간다고 하면 못 가게 하셨을 테니까요. 일에 열중하면 좌우를 살피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데 옷이 걸려 들어간 걸 모르고 있다가 다치고 말았죠.

▶ 어린 마음에 상처가 대단하셨을 거 같아요.

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워낙 긍정적이에요. 그런데다가 부모님이 제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자라게끔 이끌어주셔서 무리 없이 자랄 수 있었고 또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거 하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정신없이 살았어요.

▶ 고향은 어디세요?

경남 마산에서 자랐어요.

◇ 그림에 남다른 재주는 부모님의 영향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외과의사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전문가는 아니셨는데 직접 그림도 그리시고 만들기도 하셨어요. 그리고 고미술품도 좋아하셨고요. 저희는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걸 사용하면서 자랐어요. 우리 문화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죠. 고가구나 도자기 등의 고미술품을 그냥 둔 게 아니고 만지고 사용을 했거든요. 지금도 어렸을 때 쓰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옷가지 등을 넣어두고 사용하고 있어요.

▶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셨는데 부모님의 영향도 있으셨겠죠?

아버님이 외과의사신데 그림을 곧잘 그리셨어요. 평소에도 풍경화라든지 해부학에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리셨어요. 역사도 좋아하셔서 주무실 때도 그냥 주무시는 걸 못 봤을 정도로 항상 책을 손에 들고 계셨어요.

▶ 상도 많이 받으셨다고요?

4,5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마산이라는 지역 자체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어요. 그리고 사계절이 다른 지방과는 달라서 바다가 있고 육지가 있어서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드는 곳이라 좋은 선생님이 많이 계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말 좋은 선생님들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밤바다를 실제로 그리러 나간 기억도 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렸어요. 제가 성장해서 보니까 4,5살 이 때가 평생을 가는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에게 조기교육을 시키는데 굳이 영어를 가르친다든지 다른 문자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창의력을 키워주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머니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게 아이들은 가둬놓으면 창의력이 안 생겨요. 내버려두면서 자유롭게 사고를 해야지 창의력이 생기거든요.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도 글씨를 안 가르쳤어요. 뭘 가르쳤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희곡 극작가가 있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이모라고 불렀는데 아이들과 인형극을 만들어서 놀게 하면서 이야기하게 시켰어요. 글씨는 한 명도 안 가르쳤는데 첫째는 스스로 글씨를 깨우쳤고 둘째는 학교를 가니까 글씨를 모르는 3명 중의 1명이더라고요.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굉장히 걱정을 하셨는데 저는 걱정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애들이 다 커서 20대가 넘었는데 엄마는 자기들을 방목했다고 해요.(웃음) 그래도 큰 라인을 잡아주면서 했기 때문에 저만큼이라도 아이들이 생각하면서 자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 싱가미싱은 유일한 놀이, 가죽소파를 꿰매기도

▶ 바느질이나 옷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으세요?

그리고 만드는 것을 동시에 했고 저희 할머님이 싱가미싱을 갖고 계셨는데 옛날에는 아주 비싼 혼수품으로 통했어요. 그걸 제가 가지고 놀았어요. 처음에는 두꺼운 가죽을 박다가 바늘도 부러뜨리기도 하고 또 아버님이 외과의사시니까 동그랗게 생긴 수술용 바늘을 가져다가 소파를 꿰매기도 했어요.(웃음)

▶ 한쪽 손이 불편하니까 일부러 부모님께서 그렇게 시키신 건가요?

부모님은 저한테 뭘 하라고 한 적이 없으세요. 하지 말라고 하시지도 않았고 자유롭게 두셨어요. 그냥 옆에서 말씀 안 하시고 도와주신 거죠. ‘이걸 해라, 마라’ 말씀을 안 하셨기 때문에 제가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4남매인데 제가 둘째에요. 위로 오빠가 있고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어요.

▶ 대학교 때 뭘 전공하셨어요?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그림은 어려서부터 계속 그렸고 중학교 들어가면서 팔을 다치는 바람에 4월에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왼손으로 글씨를 괴발개발 쓰는데 미술부 선배가 찾아왔어요. 미술대회에 나가자고요. 그 선배도 그때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고 저 역시도 팔을 다쳤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미술대회를 나갔어요.

초등학교 때야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지만 지금은 팔을 다쳤는데, 그런데도 미술실기실에 가서 그림 한 장 연습하고 대회 나가서 큰 상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선생님들이 저를 격려해주시려고 일부러 상 주신 거 같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용기백배해서 그림 그린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녔어요.(웃음)

▶ 대학생이 되면서 한쪽 팔이 없다는 것에 불편한 점을 느끼시지는 않으셨어요?

물론 힘이 들고 아플 때도 있었지만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자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장해서 사회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생활해 보니까 의식을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더라고요.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한테 장애가 있다는 것보다는 다른 궁금한 게 더 많았어요. 물론 한 손으로 하는 게 쉽지 않고 불편하죠. 하지만 마음먹고 하니까 되더라고요.

▶ 처음에는 의상 디자이너보다는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지금도 그림과 옷이 별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색감과 형태의 문제라서 조형적인 거잖아요. 정식발표를 안 해서 그렇지 그림은 지금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느 누가 봤을 때 가슴에 전해지는 그림이 진정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옷이라는 것도 입히는 옷, 보이는 옷, 벽에 걸리는 옷이라고 할 때 물론 입어서 완성이 되지만 자체 안에서 누구든지 봤을 때 예쁘다, 좋다, 갖고 싶다는 게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 ‘무대의상은 이나경’ 이름 떨친 한지 의상

▶ 한복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전부터 옷을 계속 만들고 있었고 세상에 발표된 게 78년도였죠. 이화여대 대학원 다닐 때니까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공연 때였어요. 오태석 선생님이 저를 뽑아주셨는데 제가 하겠다고 찾아간 것도 아니었어요. 오태석 선생님이 이화여대 미대 연극반 연출을 오랫동안 하셨었어요.

지금은 LA에 있는 김숙이라는 선배 언니가 옷을 했는데 언니와 제가 가까이 다니니까 선생님 눈에 띄었나 봐요. 지금은 신촌역 앞이 잘 돼 있지만 당시에는 먼지도 날리고 좋은 길은 아니었어요. 그곳에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아침에 거기서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나 따라와라, 너 이번에 옷 해” 그래서 옷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그 작품에 김민기 선생님이 내레이션을 맡았고 김영동 선생님이 대금을 부시고 당시에 다 20대 때였어요. 오태석 선생님이 다 뽑아주신 거예요.

▶ 당시에 무대에 올린 의상이 한지로 제작이 되었다고요?

오태석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종이로 의상을 해보자고, 조선시대에 종이옷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기록도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지 여러 가지를 생각했어요. 연극 ‘태’가 단종애사 이야기잖아요. 사육신 같은 경우는 한지에다가 빳빳한 천을 배접해서 받치고 한지를 위에다 풀로 붙이고 하니까 옷의 느낌이 크고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면서 극중효과도 나더라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서 옷들을 만들었어요.

단종 옷은 매번 사약 받는 장면에서 먹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부으면 먹물이 옷에 묻은 느낌이 나고 밑에서 번져 올라가는, 독이 퍼지는 듯한 느낌으로 노란 색의 한지로만 만들었는데 공식석상에서 발표돼서 만들어진 것은 제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발표되자마자 신문에서도 많이 다뤘죠.

▶ 그래서 ‘무대의상 하면 이나경’ 이렇게 된 건가요?

그렇게 의상을 발표하니까 당시에 저한테 옷 해달라고, 주위에 연극하시는 분들이 저한테 옷을 맡아달라고 해서 6개를 맡았는데 그 정도면 대단한 거였어요. 그런데 하다가 보니까 또 이게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리고 중간에 큰 계기가 있었는데 서울국제무용제에서 지금 부산대학교 교수로 계시는 강미리 선생님의 ‘류’라는 작품으로 고구려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의상으로 대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지난번 APEC을 부산에서 할 때 부제가 ‘태평양 건너기’였어요. 모든 작품에 최선을 다하지만 이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무대의상을 할 때는 제가 무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해요. 사람들의 동선을 따라서 무대에서 그림이 그려지니까 그런 걸 다 감안해서 생각하고 옷을 만들고 색을 만들어요. 무대의상이 다들 가난하니까 돈이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만 보는 게 아니고 누군가가 보지 않을까 생각하면 무대가 그려지는 게 저는 너무 즐거워요.

▶ 고증도 잘 돼 있어야 하잖아요?

어떤 한 분야가 궁금하고 표현해보고 싶으면 모든 책과 자료를 다 찾아요. 최근에야 컴퓨터를 만질 수 있게 돼서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모든 게 다 있는 줄 알았더니 보편적인 이야기만 있더라고요. 일단 궁금하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접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찾고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책을 구입해요.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보다는 마음대로 책을 보고 파고들 수 있기 때문에 자료는 완벽하게 다 모아서 합니다.

▶ 잠은 얼마나 주무세요?

예전에는 거의 밤샘을 했죠. 1,2시간씩 살짝 눈 붙이고 요즘은 밤에 자려고 노력합니다.

◇ 옷감은 환자의 생명과 같아, 매순간 최선 다해야

▶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신가 봐요.

우리 작업실 식구들과 일하는데 처음에 만났던 사람들과 계속 일을 하고 있어요. 말은 대놓고 안하는데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가르치는 학생들한테도 이야기해요. 의사가 환자를 다룰 때 조그마한 실수를 하면 환자의 생명이 없어지는데 옷감을 만지고 그림을 그릴 때 여기서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그 실수가 사람의 생명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항상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특히 물들이는 것은 정말 조심을 기해도 뭔가가 묻으면 사용을 못하게 되거든요.

▶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세요?

그런 생각도 많이 들어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좀 편하게 살지, 돈벌이도 안 되는데.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그만큼의 대가는 안 오거든요. 어제도 작업실 식구들과 회의가 들어서 못하겠다는 얘기도 했어요. (웃음) 이제는 양을 조금씩 줄이면서 주문보다는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요.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 한복을 365일 입고 다니라고 하면 힘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21세기를 사는데 시대에 맞는 옷이 있잖아요. 한복이라는 것도 시대를 지나면서 변화한 것이거든요. 물론 기본 선은 그대로 갖고 있어요. 바지 같은 경우는 BC. 2세기 몽골에서 발견된 바지나 일본에서 발견된 바지나 우리나라의 사폭바지의 형태가 똑같아요. 하지만 고구려 때 입었던 옷을 지금 그대로 입을 수는 없거든요.

핵심적인 옷선을 찾아내고 원단 등을 고려해서 현대적인 옷을 만들어서 우리도 입고 세계시장에 내어놓아도 하이패션으로 뒤지지 않는 옷을 만들 자신도 있었어요.미국 맨해튼에 가게를 내려고 했다가 911 테러 때문에 못했는데 그것도 운인 거 같아요. 그때 제대로 했다면 서양 사람들에게 우리 옷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이제는 내가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졌고 제자들에게 맡겨야죠.

전에는 특별한 디자인으로 우리 옷을 만들어서 인사동 매장에 걸어놓으면 외국 디자이너들이 사가지고 갔어요. 파리콜렉션을 가든 어디를 가든 사람들을 깜짝 놀래어줄 자신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해야겠다는 자신감은 많이 없어졌어요.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패션감각이 아주 뛰어나요.

사계절이 뚜렷하고 옛날부터 갖고 있는 미감이, 삼국시대를 거쳐서 조선시대, 지금에 이르기까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미감이 굉장한 거거든요. 섬유시장을 이태리가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요. 그걸 제자나 후배들이 할 수 있도록 해야죠.

▶ 따님이 셋인데 어떤 일을 하고 있어요?

제가 애들한테 불만스러울 때도 있어요. 애들한테 잘 삐치기도 하거든요. 뭘 해달라고 했을 때, 컴퓨터 같은 경우는 잘 모르니까 만지게 되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면 천천히 가르쳐줄 생각은 안 하고 하던 대로 해버려요. 그러면 다음에 또 부탁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천천히 해달라고 하면 아이는 짜증을 내고, 알았다고 다시는 부탁 안 한다고 하게 되는 거죠.(웃음)큰 애는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공부도 잘 했어요. 음악도 잘 해서 지금은 플루트를 하고 있고요. 둘째, 셋째는 연극 계통의 일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인정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 한 팔의 미다스, 후배양성에 힘 기울일 터

▶ 한복브랜드 ‘아라가야’를 런칭하신 게 언제인가요?

95년도에요. 피에르 가르댕이 현재 칠십이 넘었잖아요. 그분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비로소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 있겠다고 한 말이 그게 가슴에 크게 오더라고요. 디자인 하는 사람이 마케팅까지 하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인드가 안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많은 실패가 있었어요.

▶ 열심히 일을 하시다 보면 스트레스도 상당하시죠?

지금은 자주 못 보지만 친한 친구들끼리 개울가에 모여서 밤새도록 3절, 4절까지 노래 부르고 재미있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백치 아다다><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좋아해요. 조용필 씨가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도 좋아하죠. SG워너비 같은 요즘 애들 노래도 곧잘 해요. 저는 요즘 애들 노래를 들어도 귀에 들어오는데 친구들과 같이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라고요.(웃음)

▶ 부모님은 생존해 계신가요?

아버님은 제가 대학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아직도 제 뒷바라지를 하고 계세요. 매번 마지막이라고 하시면서 다 털어갔다고 없다고 하시면서도 또 마련해주시곤 해요.

▶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내가 나서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는 건 없어졌고 앞으로는 정말 제대로 된 걸 하고 싶고, 아마추어 말고 업으로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같이 열심히 가르치면서 일하고 싶어요. [ 2008-04-03 13:56:21 ]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 영상 노컷TV 채승옥/에이블뉴스 제휴사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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