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아홉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장선미 씨의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희생과 사랑’이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희생과 사랑

장선미

아버지는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형제들 중 가장 배움이 짧으셨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성실하셨고 어머니를 만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셨다. 행복한 결혼생활 속에 나와 내 동생, 두 남매가 태어났고 그렇게 더 열심히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신 아버지셨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큰 사고로 아버지의 행복과 우리 가족은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따뜻한 봄이 찾아올 무렵 오토바이를 타고 외할머니의 약을 지어오시던 중 넘어져 허벅지 밖으로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큰 사고를 겪으셨다. 모든 병원에서 아버지의 다리를 보며 절단을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인 우리를 위해 그럴 수 없으셨다. 아버지가 다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선 우리 가족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한쪽 다리로는 절대 우리를 돌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다치신 아버지와 두 남매인 우리의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병원이 곧 집이 되었다. 아버지는 7년이란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셨고, 우리 남매 또한 긴 시간을 함께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병원의 배려로 우리는 아버지의 병실 옆 침대를 쓰며 생활했고 병원에선 우리 가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때론 간호사님들이 엄마처럼 머리를 묶어주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7년 동안 20번이 넘는 작고 큰 수술을 견디시면서도 수술 후 회복도 제대로 하지 못한 몸으로 우리를 챙기셨고, 어린 우리는 아버지가 수술에 들어가시면 하염없이 둘이 앉아 놀며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렸다. 그땐 우리가 너무 어려 아버지의 수술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를 당시였다. 점차 우리가 크고 아버지의 투병 생활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병원에서도 부담을 느꼈고, 아버지는 끝내지도 못한 치료를 뒤로하고 우리를 데리고 급하게 병원을 나오셔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7년의 병원 생활을 끝냈고 아버지는 지체 장애 3급 판정을 받으시게 되었다.

급하게 병원을 나온 우리 가족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모아놓으신 재산들은 이미 다 병원비로 쓰인 뒤였다. 다행히 아버지의 장애 판정으로 우리는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하게 되었고, 임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우리 남매가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다리로 인해 아무런 경제적인 활동을 하실 수 없었다. 나라의 지원금으론 세 식구가 생활하기 빠듯했고 아버지는 항상 허리끈을 조이며 생활하셔야 했다. 본인이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하나도 하시지도 못하면서 철없는 어린 자식들이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건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셨다. 주변 복지관들의 여러 도움을 받아야 했고 철없던 나는 그런 모든 생활이 너무나 싫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아버지의 모습도 창피하고 부끄러웠고 학교 선생님께서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챙겨주시는 여러 부분 또한 모두 싫고 창피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우리 집의 환경이 나는 너무 싫었고 심지어 아버지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부끄러움과 자존심보단 자식들을 챙기기 더 급급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희생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내비치지 않으려 부단히 많은 노력을 하셨다. 매일 아침 따뜻한 아침밥과 나와 동생의 머리를 항상 곱게 빗질까지 해서 학교에 보내셨다. 생활비가 부족해도 준비물은 무조건 챙겨 보내려 하셨고 절대 남들에게 우리가 엄마가 없단 소리를 듣지 않도록 많이 노력하셨다.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옷 한 벌조차 사지 못하면서 우리에겐 늘 새 옷을 입히려 하셨다. 우리가 당신을 부끄러워할까 봐 운동회 날에도 학예회 날에도 아버지는 모습을 비추지 않으셨다. 당신 자식들의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안 좋으셨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친구와 큰 싸움을 벌이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왜 싸웠느냐 물으셨고 나는 친구가 우리 아버지를 장애인이라 놀리는 행동에 화가 나 친구들 때리고 왔다면서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잘했다 잘못했다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곤 절뚝이는 다리로 친구 집에 찾아가셔서 대신 사과를 하셨다.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버지가 더 부끄럽고 화가 났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장애가 있으셨지만 우리에겐 세상에서 제일 근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였다. 딸인 나도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항상 마음속에서 하셨을 사랑이었고 겉으론 우리를 더 강하게 키우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아는 지인분의 도움으로 경제적인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서서 일해야 하는 고된 주차장 관리였지만 아버지는 감사해하셨고 다리 한쪽이 짧아 양쪽 다리를 아파하시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치르기 직전까지 일을 계속하시며 우리 뒷바라지를 하셨다. 내가 수능을 치르던 그날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비로써 아버지는 하던 일을 그만두셨고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아버지는 한평생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 지금 나와 같은 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셨을 결혼생활이 사고로 인해 금방 무너졌고 그 이후론 자신의 삶을 아이들을 위해 다 버려야 했으며 모든 걸 희생하셔야 했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희생을 알아주지 못했을 때도 많았고 서럽고 비참한 나날들도 많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강하셨다. 그런 강한 아버지가 딱 한 번 눈물을 보이신 적이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돌봐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제일 큰 수술에 하셔야 했을 때, 우리를 어디에 맡길 수 없어 당시 보육원에 우릴 데려가셨다. 어린 우리를 떼어 놓으시며 “아빠가 꼭 찾으러 올게”란 말을 하시면서 헤어지기 싫어 우는 우리를 뿌리치고 함께 우시던 모습이 어린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평소 항상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우리를 위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크셨고 우리를 사랑하셨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우리 아버지라고 말을 한다. 그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를 이렇게 건강하고 바르게 키우셨으니 그 누구보다 나에겐 우리 아버지가 세상 제일 존경스럽다. 어릴 땐 아버지의 장애와 가정 형편이 누구보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아이처럼 느껴졌고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길이 너무 싫었다. 사춘기 땐 어머니의 부재가 커지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항도 더 크고 무뚝뚝하고 표현 없는 아버지와 마찰도 참 많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아버지가 싫고 부끄러웠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자취생활이 길어지면서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셨구나.’를 느끼며 아버지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라면 장애가 있는 몸으로 나를 온전히 다 희생해가며 두 아이를 키울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니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던 내 모습이 너무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이후론 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아버지와 좀 더 편안한 대화도 할 수 있었고 서로 좀 더 부드러운 말투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 애정 표현이 전혀 없던 아버지와 나는 점차 서로에게 서투른 애정 표현도 하게 되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과 보고 싶단 말을 이젠 아버지에게 할 수 있었다. 예전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생각들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세상에서 나만 불행아 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정말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 와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아버지는 건강하셨다가 큰 사고로 인해 후천적 장애를 가지고서도 지금까지 우리를 키워내셨고 상황을 이겨내셨다. 나는 항상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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