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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소개-⑫

밀알복지재단 주최, 가작 ‘노란 랜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10-01 12:54:48
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두 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박미경 씨의 ‘노란 랜턴’이다.


노란 랜턴
박미경


빛이 가득하다. 바닷속, 나 외엔 누구도 없다. 노란빛은 소리가 사라진 적막을 한층 더 실감 나게 한다. 두려우면서도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드는 이유를 알진 못한다. 나는 직선으로 길게 뻗어온 빛의 방향을 따라 위로, 위로 오른다. 한 마리 커다란 물고기처럼 자연스럽다.

숨을 잘 쉬고 몸도 가뿐하다. 조금만 더 오르면 무언가 나타날 듯한 데 아직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노란빛이 쏟아지는 바닷속과 빛을 따라 헤엄치는 ‘나’뿐이다. 하지만 곧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시 확신한다. 나는 어느 순간 손과 발을 완전히 멈춘 채 편안히 누운 자세가 된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뜬다. 별이 보인다.

침실 천장에 붙여둔 야광별 두 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종아리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후천적 난청을 가진 청각장애인인 내가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이용하는 방법이다. 종아리에 동여맨 손수건을 풀고 핸드폰을 꺼낸다. 시간을 본다. 아침 6시 30분. 탁자에 핸드폰을 올린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늘 올려두는 노란 랜턴도 확인한다. 힘들 때마다 빛이 되어주는 노란색 랜턴은 그 자리에 잘 있다.

‘분명 저 빛 같았는데...’ 랜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희한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외출준비를 한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우선 랜턴부터 가방에 잘 챙긴다. 저 랜턴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란 생각을 한다. 오늘 도로 주행시험에서 꼭 붙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지난주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있던 날, 버스를 타고 가다 30여 분 지각을 했다. 지각한 덕에 연습을 못 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제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내게 할당된 운전 연습을 아예 못 할 수도 있는 걸 알곤, 수강 전날에는 항상 긴장했다. 예상 도착 시각보다 일찍 출발해야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오늘은 시험 날이지 않은가. 특정 운전면허시험장에 속한 장애인 운전면허지원센터에서 무료로 운전 강습을 해준다. 먼 거리와 불편한 대중교통을 감수하고라도 이 기회에 면허를 꼭 따기로 마음먹었다. 필기와 기능을 통과하고 남은 건 도로 주행이었다. 드디어 오늘, 시험일이다.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이런...’

도로에 나서며 그제야 깜빡한 걸 알았다. 랜턴과 마스크에 신경 쓰느라 보청기를 빠뜨렸다. 가끔 귀를 놔두고 나올 때마다 황당하다. 뜬금없이 토끼가 생각났다. 간을 안 가지고 나왔다며 재치를 부려 목숨을 부지한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이구, 했다.

요즘 들어 갱년기성 건망증이 생겼는데 정신 바짝 차리는 방법 외엔 없지 하면서도 간혹 실수한다. 한 대 툭, 뒤통수에 꿀밤을 먹이고 멋쩍게 웃음을 흘린다. 나이 먹을수록 단단해지는 나를 본다. 싫지 않다. 단단해지는 일은 아프고 상처받으며 얻은 진주 같은 것, 생의 쓴 열매이며 사리다.

20대 초반부터 원인 모르게 청력이 떨어졌다. 30대와 40대를 건너왔고 이제 50대 중반이 되었다.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터득한 것은 내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러면서도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지냈다. 이전에 보청기를 했다가 두 번째 적응마저 실패했던 기억은 내게 큰 실망을 안겼지만 소중한 생을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조금만 더 알아들었으면, 더 청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불안과 아쉬움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기회가 온 건 40대 중반이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포기해선 안 된다며 손을 잡아끈 사람이 나타났다. 하늘이 도왔다. 당신은 지금 곁에 없지만 내 생의 은인으로 자리 잡았다. 건강이 안 좋은 당신이었다. 뇌수술을 받다 청신경을 건드려 한쪽 청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더 알아듣게 해준다던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여러 번 설득에도 꼼짝 안 하다가 어느 날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는 안 했다. 기대 없이 보청기 대리점을 당신과 함께 찾은 날, 제발 지금보다 잘 듣게 해달라던 당신의 바람은 기적처럼 이뤄졌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된 보청기에 나는 적응했다. 보청기는 내게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줬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더 큰 욕심을 부리며 우울 증세를 보이다가 스스로와 당신을 괴롭혔고 결국 우린 이별했다.

마지막으로 당신과 만나던 날, 당신은 물속에서도 어둠을 환히 밝힐 수 있다는 노란색 수중랜턴을 내게 주며 말했다.

“난 심장도 안 좋잖아.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도 이젠 그러질 못해. 이 랜턴을 보면 다시 바닷속이 간절해져. 신비한 산호들과 물고기들을 보고 같이 헤엄을 치는 일을 이젠 할 수가 없지. 목숨을 걸고 심해에 들어갈 용기는 없어. 사실 무서워.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당신 알아? 랜턴만 만지작거리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거. 사람은 다 자기만의 상처를 안고 사니까 당신, 잘 헤쳐 나가야 해. 이거 가져. 힘들 땐 이 랜턴을 봐. 빛을 켜고 좋았던 일들을 생각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분명 있는 거야. 각자의 길에서 후회하지 말고 우리 열심히 살자”

가끔, 당신이 생각났다. 보청기를 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아들을 때 크게 기뻐했던 그날들을 보물처럼 기억하며 용기를 얻곤 했다. 나는 당신을 잃고 한참 후에야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당신을 놓친 일을 후회했다. 보청기가 내게 주는 한계를 알아버리곤 놀부 욕심을 부렸다. 잘못된 마음이었다. 사는 일이 버겁다 여겨질 땐 당신이 주고 간 노란 랜턴을 어루만지거나 빛을 비춰보며 위로를 얻는다. 당신의 마음과 당신이 남긴 노란 랜턴은 내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용기를 얻고 살아갈 열정을 부르는 촉매제다.

터벅터벅, 계단을 오른다. 집으로 들어선다. 제습통에 담긴 보청기를 꺼내 집어 든다. 귀에 쏙 들어가는 보청기를 끼곤 아아, 가나다라, 아아 가나다라. 마이크 테스트하듯 말소리를 내본다. 왼쪽과 오른쪽 귀를 번갈아 막으며 내는 소리다. 보청기 없이 외출한다는 건 세상과의 단절이다. 사람의 입과 표정을 읽는 구화를 스스로 터득했기에 수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건청인이 아니고 완전 농인도 아닌 후천적 난청인, 청각장애인이라는 입장은 애매하다.

가끔 자막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는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위해 일정한 날을 정해 자막과 해설을 곁들여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다. 자막이 있는 한국 영화를 보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에 관람을 하러 간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농인들이다. 상영관 대기실에서 손 말을 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입장 시간이 오길 기다린다. 수화를 쓰는 그들의 세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난청인인 내가 그러듯 그들은 수화를 쓰지 않고는 소통 자체가 힘드니 수화보급에 집중하는 것일 거다.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나는 그곳에서도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수화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의 고충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때뿐 수화의 필요성은 금방 잊고 만다. 중증의 난청을 겪는 나마저도 이러한데 건청인들이야 수화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그다지 없을 것이란 생각에 농인의 입장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나의 이기를 본다.

다들 서로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아픈 사람은 아픈 대로, 억울한 사람은 억울한 대로 아픔과 고난의 짐을 지고 적응하며 산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과 나를 대하며 나의 결손을 위로한다. 장애를 안고 사는 일이 절망은 아니다. 하지만 자주 부딪는 벽을 맞대야 하는 불편은 어쩔 수 없다. 불편을 아파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지 꽤 되었다.

시속 40킬로로 달린다. 옆에서 코치하던 작업치료사 대신 감독관이 조수석에 앉아 있다. 출발 전에 말했다. 기계 음성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수 있으니 좌회전 우회전을 지시할 때 한 번 더 손짓과 음성으로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감독관은 그러겠다 했고 시험인지라 긴장도 됐다.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감독관에게 물어가며 신중하게 운전을 했다.

운전석에 앉은 나는 액셀과 브레이크를 스무스하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스무스하게 밟는 게 중요하다고 작업치료사가 연습 때 알려준 그대로 했다. 학습의 효과는 대단하다. 실격이나 큰 실수 없이 거뜬히 합격했다. 치료사의 제대로 된 훈련과 케어 덕분이다. 나는 운도 좋다. 운전 연습을 하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것에 감사가 절로 나왔다. 고맙습니다. 합격했어요! 환한 얼굴로 장애인 운전면허지원센터 직원들에게 합격을 알렸다. 꼭 차 끌고 놀러 오세요. 작업치료사와 인턴 여직원이 내게 말했다. 서로를 보며 환히 웃었다.

가벼울 걸음으로 운전면허시험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 든 노란 랜턴을 꺼내 가슴에 꼭 품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고마워요. 당신, 당신이 다 못 산 시간과 못다 한 열정을 더해 내가 더 열심히 살게요. 힘낼게요.
고개 들어 하늘을 봤다.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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