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네 번째는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상 수상작인 김 선씨의 ‘오늘도 천천히, 크게’다.

오늘도 천천히, 크게

김 선

첫 시간이었다. 유독 눈동자가 새까맣고 진한 그 아이는 맨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몇 번 만나지 않는 영어전담 선생님이라 항상 아이들에게 즐겁게 다가가자 다짐했던 나는 힘차게 문을 열며 한껏 신나는 목소리로 “Hi! Everyone!” 하고 웃으면서 들어갔다. 손을 흔드는 아이, 빙그레 미소로 화답하는 아이, 수줍게 하트를 날리는 아이, 마치 봄날 들판에 살랑이는 바람처럼 아이들의 얼굴에는 나를 향한 반가움과 설렘이 번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그 아이만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영어라는 과목 특성상 첫 수업 시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소하기도 하고,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잘할 수 있을까 잔뜩 겁을 먹기도 한다. 심지어 긴장감에 오줌을 지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 긴장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이에게 따뜻한 인사말을 하며 수업을 시작하였다.

참 희한하다. 나의 따뜻한 인사말도, 즐겁고 경쾌한 수업도 통하지 않았나 보다. 아이가 전혀 웃질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고 녀석, 웬만하면 웃어주지...그렇게도 긴장된 건가? 대부분 아이들은 긴장하면 자꾸 눈 맞춤을 피한다. 이 특이한 아이는 그래도 계속 내 얼굴을 쳐다본다. 그것도 아주 똑바로 정자세로 나를 쏘아보는 게 아닌가? 계속 나를 따라 고개가 움직인다. 그리고 먼가 알겠다는 듯 혼자 고개도 끄덕인다. 참 희한한 녀석이군! 정말 그랬다. 그 아이의 첫인상은 희한한 녀석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도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나를 쳐다보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아이가 대견스럽고 고마웠지만 희한한 그 아이의 표정은 참 잊히지 않았다.

“어머,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가 바빠서 말씀드린다는 게 안내를 못 드렸어요. 저희 반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 있잖아요.”

갑자기 급하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하시는데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아, 그랬구나! 나를 항상 쏘아보듯 바라보는 그 아이는 사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내 입 모양을 보고 구화(口話)로 알아듣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참 희한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장애 판정을 받고 난 이후, 특수학교로 가지 않고 일반학교로 진학했으나 다른 아이들에게는 선입견이 생길 수 있으니 천천히 알도록 해달라는 학부모님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많지 않은 듯했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아이는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의 입 모양을 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배우는 영어를 내 입 모양을 보고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알아듣겠다고 고개도 끄덕이고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한껏 V자 눈썹을 하고 찡그린 채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 만나는 시간 모든 아이들이 웃을 때 왜 웃지 않았는지, 나의 따뜻한 인사말에도 큰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의 속사정도 모르고 희한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열심히 치열하게 이해해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 제자를 그렇게 생각했다니, 참 한심한 선생님이다. 너무 부끄러워 한동안 멍하니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출석부를 바라보았다. 교사로서 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심히 하고자 했던 아이를 잘못 생각했던 미안함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 선생님! 그건 뭐 하시는 거예요? 단어 카드에요?”

“네, 맞아요. 우리 친구들 영어 단어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만들어 왔어요!”

새롭게 만들어 온 단어 카드에 아이들의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우린 다 안다며 유치원생 취급하는 게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초록 칠판에 붙여진 단어 카드들은 조금 아이들에게 생소한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단어 알파벳 음절에 맞춰 찍은 내 입 모양 사진을 단어 아래에 붙여서 만든 카드였다. 그때, 지금껏 항상 나를 바라보았던 눈동자가 새까만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입 모양을 보면서 공부하면 영어 발음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단어 공부할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입 모양을 더 크게 천천히 보여줄 거예요. 선생님의 입 모양을 잘 보도록 하세요. Green. 그-으-린.”

설명과 함께 내 입을 있는 힘껏 최대한 벌려서 과장된 입 모양으로 발음해 주었다. 선생님 표정이 웃기다며 낄낄 웃는 아이들도 있었고,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따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함께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중 제일 열심히 하는 아이는 바로 그 아이였다.

처음 보았다. 아이가 환히 웃으면서 단어를 따라 말하려고 하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입을 크게 벌리면서 내 입 모양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그렇게 예쁘고 환하게 웃는 아이였다니!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나와 교무실로 가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세상에나! 그 아이였다. 혹시나 다른 사람을 부른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나를 부른 게 맞는지 재차 확인해보았다. 아무도 없다. 나를 부른 게 맞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할 말이 있는지 몇 번을 망설이더니 나에게 수줍게 한마디 하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수줍게 용기를 낸 작은 목소리가 떨려서 발음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처음 들어본 그 아이의 목소리는 참 따뜻했다.

“서은새님, 고마슴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