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보건복지부, 국민일보, 에이블뉴스, MBC나눔의 후원으로 ‘제 4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393편 접수됐다. 이중 이영순씨의 ‘기적’이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8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5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아홉 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김지윤 씨의 ‘무제’이다.

무제

김지윤

"너도 나랑 짝하기 싫지?"

처음 짝이 된 너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너가 싫지 않았고, 억울했다. 초등학교 3학년, 너의 어린 마음은 가시 돋친 장미 마냥 날카로웠고, 나를 그를 꺾으려는 사람인 양 취급했다.

알고 보니, 내 친구들은 너를 많이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코딱지를 파서 책상 밑에 묻힌다더라, 머리를 안 감아서 비듬이 떨어진다더라 등 온갖 더러운 말은 모두 너의 수식어였으며, 참 안타깝게도 그 수식어는 모두 사실이었다. 너와 짝을 하는 한달 동안에, 너의 책상 서랍 밑에 붙은 수많은 코딱지가 내 다리를 간지럽혔으며, 손등위로 떨어지는 하얀 비듬 가루가 내 공부를 방해했다. 아직 대소변을 가리지못해 기저귀를 차는 너는, 수업 시간 중에도 선생님을 찾곤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친구들은 너의 다른 면은 모르는 듯했다. 책상 한 켠에 써 있는 역대 대통령의 업적과 이름, 조선시대 왕의 이름까지. 초등학교 3학년의 수준으로 보기엔 어려운 지식이었다.

한창 공주에 빠진 나는 '선덕 여왕' 이 쓰여진 너의 공책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영훈아, 우리나라에도 여왕이 있어? 공주는 없어?" 라는 말을 계기삼아, 우리는 한도 끝도 없이 가까워졌다. 날카롭기만 해 보였던 너는 의외로 단순했다. 내게 여왕 이야기를 그렇게나 자세히 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기에, 너는 내게 역사 선생님이자 신기한 친구였다.

너와 내가 한없이 가까워진 어느 날, 우연히 교무실에 갔다가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훔치시는 너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누군가 너의 가방에 상한 우유팩을 넣고 밟은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은 너는, 그 가방을 메자 다리에 흐르는 하얀 액체를 보고 쉬를 너무 많이 했는지 하얀 쉬를 해버렸다며 울었다더라. 얘기를 몰래 엿듣다, 너의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가, 미안하다.." 나는 아가도 아니고, 사과를 들을 이유도 없는데, 너의 어머니는 내게 사과를 하셨다. 궁금한 마음뿐이었다. 너는 뭘 잘못했을까, 너의 어머니는 왜 내게 미안해하실까, 너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걸까. 너의 어머니는 뭐가 그리 소심하신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 아가들 혼내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누가 영훈이를 괴롭히는지 찾아만 봐주세요." 라는 말은 그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선생님께선 참 열심이셨다. 다음 날, 우유를 마시고 받는 우유 스티커가 없는 아이들부터 찾아냈고, 쉬는 시간마다 우리를 열심히 관찰하신 결과, 한동안은 교실이 조용했다. 덕분에 나는 네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선덕 여왕' 얘기를 들었는데, 넌 그런 내게 '덕혜 옹주' 이야기를 무려 네 번째 하고 있던 와중에, 선생님이 너를 불렀다. 한참 있다가 너는 중얼중얼 거리며 자리에 도로 앉아서는, 10분가량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엄마, 내가 우유를 안 먹고 몰래 숨겼다가 모르고 밟았나봐요.. 내가 모르고 우유를.." 선생님에 네게 시킨 말이었다. 영훈이는 그 날 우유를 먹었는데, 제티에 타서 나랑 나눠 먹었는데, 너는 우유를 안 먹었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선생님은 왜 네게 거짓말을 시키셨을까. 너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학부모회장 아줌마 딸이라서? 팔에 작은 멍이라도 있으면 달려와서 소리지르던 아줌마 아들이라서? 원망스럽게도, 난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선생님은 그저 일 커지는게 싫으셨던 것 같다. 아니, 그냥 그 일을 감당하기 싫으셨던 거다. 아, 왜 너는 선생님도 외면하는 아이였을까.

짝 바꾸는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무도 나와 짝을 안 하려고 한다. 원래는 내가 먼저 앉으면 그 다음 순서 친구는 꼭 내 옆에 앉았는데, 내 옆자리가 끝까지 비어 있었다. 아차, 너와 지내는 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너와 같이 코 파고 머리 안 감는 애가 되었나 보더라. 나와 부딪히는 아이들은 수군댔고, 옮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냥 나는 공주얘기를 해주는 너가 좋았던 건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네게 알 수 없는 전염병을 옮은 '왕따' 가 되어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내 앞에서 너가 콧물이 안 닦인다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 가끔 사물함에서 기저귀를 꺼내 선생님과 화장실에 가는 모습, 어떤 대통령을 가리키며 화내는 모습들을 흉내 내는 내 친구들이 낯설었다. 내가 네게 얻은 것이 라고는 즐거운 공주 이야기밖에 없는데, 전염병을 얻은 게 아닌데, 억울했다.

사실 나는 친구가 너 하나밖에 없는 게 싫었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 따위 주어지지 않았고, 나는 싫어도 너와 만 놀아야 했다. 너에겐 너무 가혹하고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네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말을 하는 것도, 말을 하고 나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것도, 쉬는 시간마다 날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귀찮았다. 내 자신이 불쌍했고,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을 후회했다. 너의 어머니를 본 순간 들었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느낌표로 바뀌는 나날들이 지속됐다. 물론, 유독 소심한 나는 네게도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아, 덕분에 역사 시험을 백 점 맞을 때 빼고는 정말 네가 싫었다. 앞에선 감탄사를 연발하며 너의 비위를 맞춰주고, 속으로는 너를 귀찮아하며 어린 나는 처음으로 감정을 속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학교 CA가 있던 금요일, 다른 반 친구들과 놀 수 있는 그 날이 내게 유일한 쉼터였으며, 안식처였다.

너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게, 너가 초대장을 건네 왔다. '영훈이의 생일파티에 초대합니다.' 성대한 파티를 좋아라 하는 어린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나에게는 혹할 만한 초대였다. 작은 손에는 삐뚤빼뚤 오린 포장지로 감싼 필통을 들곤, 너의 집을 들어간 순간 나는, 그 어떤 어른보다도 깊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나의 생일인 듯, 좁은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빽빽한 잔칫상이 두 탁자 가득히 채워져 있었으며, 주인공은 너 하나인데 케이크는 내 것까지, 두 개였다. 날 위한 음식을 먹는 동안 너의 집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약, 나이와 맞지 않는 어린 아이의 장난감들, 기저귀 등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너의 어머니는 이런 나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는 "고맙다" 고 되뇌이셨다. 나의 모든 원망과 후회들을 이해한다는 듯한 어머니의 표정과 고맙다는 한마디가 어린 나를 합리화시켰다. 너를 미워한 나날들이, 너를 괴롭히던 나의 친구들이 원망스러웠다. 아기같은 너에게 미안했다. 선생님, 친구로만 보였던 네가 안타까워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날 이후 너는 내 마음 속에 두고 나온 우산 마냥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나는 네가 아닌 나를 위해, 너를 챙겨야했다. 너를 챙기지 않으면 초등학교 3학년의 작은 내 몸집보다 더 큰 무거운 마음이 날 괴롭혔고, 하루 종일 네가 신경 쓰였다. 책상 아래 붙은 너의 코딱지들, 사물함 틈새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기저귀들, 너의 어깨에 자리 잡은 하얀 가루들을 모두 치웠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허공에 대고 "영훈이 다 나았다며!" 하며 어린 마음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이렇게 하면 네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고, 친구들도 너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바람대로, 다행히도 순수했던 친구들은 너의 공주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나라에도 공주가 있었고~" 하는 너의 이야기를 나는 백 한 번째 정도 듣는 것 같았는데, 그 백 한 번째 듣는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수 없었다. "영훈아, 나 공주야?" "영훈아, 누가 더 그 공주 랑 비슷해?" 하며 너의 이야기는 우리 일상에 자리 잡았고, 몇 몇 친구들은 아기 같다며 너를 귀여워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보다는 동생으로 보는 시선들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그거면 됐다.

장애는 나을 수 없는 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몰랐는데, 그 이후로 너는 키도 크지 않더라. 그 순간,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너는 여전히 대통령들과 왕의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공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너라는 나라의 공주가 되었고, 초등학교 내내 너는 흔쾌히 나를 공주로 받아주었다.

너의 이야기는 고등학생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나는 다른 공부 없이도 한국사 시험을 잘 칠 수 있었다. "너는 한국사 공부 어떻게 해?" 라는 말에 나는, "내가 예전에 공주였어."라고 대답하며 웃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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