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그와 함께 잠을 잔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잠은 그의 최대 적이었다. 활동할 때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도움을 받지만, 잠을 청할 때는 그들도 잠을 자야하니까. 밤새 온몸을 뒤척여주며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데, 무겁기도 하고 쏟아지는 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잔다고 해도 그건 자는 게 아니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던 그였다. 게다가 그를 혼자 둔 채 한밤중에 활동보조인이 도망가는 일도 있었고, 휠체어에서 침대까지 옮겨줄 사람이 없어 휠체어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다. 정말 24시간 활동보조인이 필요한 최중증장애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처음 주장한 활동보조인 제도, 자립생활운동을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 제도들이 ‘인권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그는, 그저 자주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애쓴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현준열사추모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용기 소장은 고 이현준 열사를 이처럼 기억했다. 장애인 활동가였던 고 이현준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지난 16일 저녁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 모여 ‘고 이현준 열사 1주기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고 이현준 열사는 근육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 혼자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근육디스트로피라는 희귀질병을 가진 중증의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애인계간지 열린지평 객원기자,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에서 연구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함께걸음’ 기자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01년부터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장애인기초연금제, 성년후견인제도, 콜택시, 장애비하용어 정리, 차별금지법, 활동보조인제도, 자립생활제도 도입 등 장애인 정책 생산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렇게 다니다 죽을지 모른다는 경고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그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가 정작 두려워한 것은 장애인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세상에 대한 스스로의 체념이지 않았나 싶다. 자신이 서는 순간 ‘장애’라는 형벌을 곱게 받아들이는 투항자가 돼버리는 것이니, 부당한 형벌을 견딜 수 없다는 자존심이 그렇게 힘든 몸을 이끌고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며칠을 휠체어에 앉아 잠을 자면서도 ‘이건 바꿔야 해’ ‘난 포기할 수 없어’ ‘난 좀 더 살아야겠어’라고 말하던 현준이.”(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윤두선 대표)

고 이현준 열사의 직접적 사인은 가래가 기도에 막혀 발생한 호흡곤란. 당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책상에 손을 올려놓는 것도 어려웠고 잠자는 동안 몸을 뒤척여줄 기계를 이용해야 했을 정도로 장애가 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활동보조인 서비스와 같은 그의 생활을 보조해 주는 사회적 지원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상의 버거움을 온전히 그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

이현준열사추모사업회는 “고 이현준 열사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삶 자체가 장애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며 “매 순간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해 끝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우고, 모순으로 점철된 세상의 차별과 억압에 저항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속도’의 문제가, ‘자본’의 본질이, ‘권력의 횡포’가 중증장애인을 차별하는 주범임을 그를 통해 알았음을 고백하곤 한다. 그래서 그가 살아생전 가장 중심에 둔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있어 가장 절박한 현실적 과제는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제도’와 ‘자립생활지원방안’의 도입이 아닌가 한다. 수많은 과제가 있지만, 중증장애인에게는 근원적인 삶의 틀 거리이다.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아니 장애해방 참 세상을 바란다면,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지는’ 삶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인간답게’를 실천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열사이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장애해방’의 그 길에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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