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균동 감독과 주인공 김문주씨가 영화촬영 준비를 하고 있다.<국가인권위원회>

여균동. 사실 장애인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다. 연출자이자 연기자, 영화프로그램 MC 등등 다양한 프로필을 가진 여균동(43) 감독은 95년 개봉된 영화 '세상밖으로'(문성근·이경영·심혜진 주연)를 통해 데뷔했다. 이후 '죽이는 이야기', '내 컴퓨터', '美人' 등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너에게 나를 보낸다', '박봉곤 가출사건', '이재수의 난' 등의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작품의 이력을 봐도 장애인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왜 그는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굳이 장애를 주제로 '대륙횡단'이라는 작품을 찍었을까?

"두 다리를 못쓰는 선배가 한 분 있었다. 그는 항상 분노했고 항상 명랑했다. 나는 그에게서 장애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부스스한 그의 고수머리와 나의 직모가 더 큰 차이라고 느꼈을 정도였다. 한번은 그가 술을 먹고 광화문을 횡단했다. 물론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그게 한 이십 년 전이다. 그 그림이 남아있었다. 인권위에서 처음 차별에 관한 영화를 제안 받았을 때 그 그림이 떠올랐다. 아주 명랑한 분노로 말이다."

소아마비로 다리 절던 기억 더듬어

'대륙횡단'은 여 감독의 이러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했다. 여 감독 또한 한때 장애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리를 절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통에 공을 멀리 찰 수 없어 친구들로부터 '헬레레'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고 한다.

"나 역시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었고 초등학교 때까지 다리를 절고, 혹은 목발을 짚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공을 차도 멀리 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헬레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해가 지도록 공을 찼다. 그래도 공은 멀리 나가지 않았다. 이런 기억이 장애인을 만났을 때 친근함을 느끼는 통로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기억과 연민으로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고 풀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영화제작과정에서 장애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촉하면서 광화문 횡단은 단순한 '무단횡단'을 넘어 진짜 '대륙횡단'이 돼 갔다.

"광화문 횡단이라는 그림만 갖고 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애인이라해서 모두 동일하지 않았다. 그 장애의 상이성과 정도, 경제사정, 성장배경, 가족환경, 남녀, 나이, 교육정도…. 그에 따라 영화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특히 광화문횡단의 위험성으로 인해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됨과 동시에 찬반양론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적 단편 사이에서 동요하며 갈등했다. 그 사이 그들의 경험과 생각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광화문 횡단은 단순한 횡단이 아니게끔 변화됐다."

▲여균동 감독, 그에게도 장애의 아픔을 겪던 기억이 있다.<에이블뉴스>
다양한 장애인 경험 영화에 영향

이러한 변화는 영화에 형식에도 영향을 줬다. 영화는 장애인 김문주씨가 겪는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여 감독은 이 영화의 형식을 '엽편영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엽편영화라는 형식을 생각하게끔 됐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수한 이야기가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서로 연관이 된다. 아마도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이 지닌 간단치 않은 내용과도 연결된다. 장애인이 이동할 권리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일종의 인권선언이기도 하다. 즉 장애인을 넘어선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고 그 질문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런 긴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그게 '대륙횡단'의 그림이 됐다."

뇌병변 여성장애인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국내 여성장애인들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 주요 이유로 여성장애인들은 "여성장애인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대륙횡단에서 장애인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질까?

"장애인이 객체로 그려졌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고 나 역시, 대륙횡단이라는 단편도 그 질문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시사가 끝나고 관계자 한 분이 영화의 대사를 문제삼았다. '네가 뇌성마비라서가 아니라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는 말이다. 왜 화살을 장애인에게 쏘냐는 말일 게다. 바위덩어리처럼 버팅기고 있는 편견과 현실이 엄연한데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극복의 주체 역시 당사자가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출발하면 같이 갈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 감독의 차기 영화들에도 '장애'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는 계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개인적으로 주류에는 관심이 없다. 언저리에 나앉은 사람들의 시선에 마음이 간다"며 "그 언저리가 모두 장애인이 아닌가 싶다"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광화문 네거리, 그 성역을 깬다'

광화문 네거리 무단횡단 시도하는 장애인 이야기

여균동 감독의 새 영화 <대륙횡단>

▲주인공 김문주씨가 광화문 네거리를 무단횡단하다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있다.<국가인권위원회>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광화문 네거리는 쉴 틈이 없었다. 월드컵에서부터 촛불시위까지. 사실 그전부터 광화문 네거리는 한국 정치의 상징이자 서울의 교통의 중심부였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주무대도 바로 이 광화문 네거리였다.

인권영화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여균동 감독 또한 이 광화문 네거리를 택했다. 횡단보도도 없고, 지하도에 리프트 설치도 돼 있지 않은 이 곳, 광화문 네거리를 장애인들이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화 '대륙횡단'에서는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무단 횡단하는 실제상황이 펼쳐진다. 주인공으로는 실제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고입과정에 다니고 있는 뇌성마미 장애인 김문주(32)씨가 맡았다. 목발에 의지해 살아가는 김문주씨는 한번의 예행연습을 걸쳐 광화문 네거리 무단횡단을 시도하는데….

'대륙횡단'은 광화문 네거리 무단횡단이외에도 김문주씨가 장애인으로 일상생활에서 겪는 총 13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러닝타임이 10분에 불과하지만 여 감독은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다양한 차별과 인권침해를 풍자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여 감독은 장애인들이 가족관계에서 겪는 소외문제, 당사자가 중심이 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의 친절, 장애인들의 이성문제, 취업문제 등 장애인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세심한 접근을 시도했다. 감독은 문제의 원인을 전반적으로 장애인이외에 열악한 사회의 현실에서 찾고 있지만 장애인 자신을 향한 아픈 지적도 주저하지 않았다.

"뇌성마비라서가 아니라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 김문주씨에게 한 장애인친구가 던지는 이 대사는 비장애인 관객뿐만 아니라 장애인 관객에게도 장애인 문제의 해결을 향한 강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광화문 횡단은 세상에 대한 도전"

대륙횡단 주인공 김문주씨

▲대륙횡단의 주인공 김문주씨가 광화문 네거리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장애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에이블뉴스>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한 도전이요. 장애인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이 세상에 대한 도전이죠."

'대륙횡단'의 주인공 김문주(32·뇌병변2급)씨는 극중에서 광화문 네거리를 무단 횡단하는 장애인이 이렇게 생각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횡단보도도 없고, 지하도에 리프트도 없는 광화문 네거리는 장애인의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외면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대륙횡단'의 주요 테마는 장애인의 이동권이다. 김씨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이동권 운동의 핵심에 서 있는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고입과정에 다니고 있다. 목발에 의존해 사는 김씨에게도 이동권은 사막의 물과 같이 절실하다.

"계단에서 구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많으면 그냥 가다가 서버려요. 부딪혀서 넘어지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것이 나아요. 비가 오면 미끄러우니까 아예 밖에 나가지 않아요."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노들야학이 있는 서울 광진구 정립회관은 사실 그리 짧은 거리가 아니다. 매일 야학을 오고가는 중에 그는 수없이 많은 계단에서 넘어지고 다쳤다.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데 이것만 보면 짜증이 나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승강장까지 바로 내려갈 수가 없어요. 계단이 또 나오죠. 장애인을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이렇게 안 만들었을 텐데…. 새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가 많아요. 장애인들에게 한 약속이 꼭 지켜졌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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