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재문이를 데리고 수안보 온천으로 가서 이틀 밤을 자고 월요일 아침에 애를 학교로 데려다주고 내려왔습니다.”

할머니는 맨날 그렇게 울고 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울고불고하는 것은 할머니와 아이 엄마뿐이었다. 재문이는 울지도 않았고 환경에 적응을 잘했다.

할머니: “몇 달을 그렇게 울고 나니까 눈물이 다 말랐는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용호동 이기대에서. ⓒ이복남

그러나 토요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재문이를 데리러 가는 것은 여전히 할머니의 몫이었다. 남동생이 태어났다. 세상에나, 남동생도 증상이 재문이와 똑같았다. 동생이 커서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아이 둘을 충주까지 보내기가 어려웠다.

할머니: “동생을 부산맹학교 유치부에 입학시키면서 재문이도 부산맹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재문이가 부산맹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그룹 홈에서 다녔다. 그룹 홈에서 시각장애인 몇 명이 생활하면서 그룹 홈 선생이 아침마다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데려왔다.

할머니: “그 무렵부터 제가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부산맹학교는 동래구 명장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재문이의 집은 김해였다. 재문이는 그룹 홈에서 생활했지만, 동생은 맹학교 유치부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할머니가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재문이가 그룹 홈을 나와서 집에서 다닐 때 김해에서 명장동까지 다니기가 너무 멀어서 맹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맹학교 근처로 이사하자 할머니는 아이들을 아침에는 학교로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재문: “고등학교까지는 집에서 다녔고 대학교는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미래필하모니오케스트라 협연 후 어머니와. ⓒ이복남

정재문 씨는 고등학교까지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다녔고, 대학생 때는 주로 어머니하고 다녔단다. 현재 집은 동래인데 대학교는 영도에 있다. 대학교까지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로 월요일 아침에 학교로 데려다주고 금요일 오후에 다시 어머니 차를 타고 집으로 온단다.

정재문: “어머니가 바쁘시면 가끔은 혼자서 자비콜(복지콜택시)을 타고 집에 가기도 합니다.”

정재문 씨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피아노보다는 노래와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어학원에 가고 싶어 했는데 시각장애인이라고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할머니: “영어 학원을 서너 군데를 찾아갔는데 당시만 해도 영어학원은 판서 위주라서 안 된다고 합디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학원도 안 된다고 해서 사정을 했습니다.”

아이를 시각장애인으로 의식하지 말고 한 달만 수업을 받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 대신 교재를 미리 주면 애 엄마가 점자로 찍어 줄 거라고 했다.

할머니도 점자를 아신다면서 왜 엄마일까.

할머니: “한글점자는 아는데 영어 점자는 애 엄마가 더 잘 압니다.”

송도에서 가족들과 나들이. ⓒ이복남

한 달 동안 재문이는 영어 학원을 아무 문제없이 잘 다녔다. 그래서 2년쯤 더 다니다가 원어민 선생이 있는 학원으로 옮겼는데 영어는 지금도 사사를 하고 있단다. 작년에는 방학 동안 필리핀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잘하지는 않지만, 의사소통 정도는 할 실력이라고 한다.

부모님은 재문이를 어렸을 때부터 음악 학원에 보내 피아노를 가르쳤다. 음악 학원에서 바이엘부터 기초를 배웠는데 피아노보다는 노래를 잘하는 것 같았다.

정재문: “3학년 때 방과 후에 판소리 교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얘기하니 해 보라고 했다. 그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재문: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는 재미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장래 희망은 소리꾼이었다. 대학에서도 판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대학교수에게 레슨도 받았다.

판소리 중에서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었을까.

정재문: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이 재미도 있고 맘에 들었습니다.”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은 자진모리장단이다.

“심 황후 이 말 듣고 산호 주렴을 걷어 버리고 버선발로 우루루루루 쫓아 나와 부친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판소리에 재능도 있다고 했고 그도 판소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판소리에 재능도 있고 좋아했다면서 왜 판소리를 그만두었을까.

정재문: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판소리를 했는데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판소리를 하는 한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교회 찬양 팀에 들어가서 노래를 했다.

베데스다 합창단 공연. ⓒ이복남

정재문: “어느 날 제가 다니는 교회에 고신대학교 페로스 합창단이 공연하러 왔는데 너무 멋지게 찬양하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이 바뀌게 된 것 같아요. 나도 합창단의 누나 형들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어요.”

페로스 합창단은 안민 교수가 지휘하는 합창단이었다. 안민 교수는 재문 씨가 다니는 교회의 장로이며 고신대학교 교회음악과에서 성악을 가르쳤고 같은 사랑방에 속해 있으며 현재는 고신대학교의 총장이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판소리 말고 성악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고 재문 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느 날 사람방 모임 시간에 재문 씨의 진로를 안민 장로님께 상담하게 되었다. 안민 장로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정재문: “안민 교수님은 저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이고, 저의 롤모델입니다.”

진로에 대해 기도하는 중에 우연히 베데스다 합창단을 알게 되었고 합창단을 지휘하는 박성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베데스다 합창단은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특수학교 부산혜원학교에서 창단했다. 베데스다 합창단은 대부분이 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성환 선생님이 지휘하는데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합창단이다.

베데스다 합창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박성환 선생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고신대학교와 경성대학교에 수시를 넣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학교 모두 수석이었고 재문 씨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신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안민 교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페로스 합창단 단원이 되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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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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