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동료상담 활동을 진행한 은평늘봄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선윤 소장.ⓒ에이블뉴스

동료상담사 인터뷰 섭외에 앞서 기자는 몇몇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관계자들에게 “우수 사례로 추천할 분이 있냐”고 물었다. 대부분 은평늘봄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선윤 소장(53세, 지체1급)을 꼽았다. “동료상담사 하면, 김 소장님 아닐까요?” 왜 그가 ‘동료상담’의 대명사가 됐을까.

“제가 외골수적인 면이 있어요. 동료상담이 제 삶의 굉장한 전환 포인트 였기 때문에, 동료상담에 욕심을 많이 부리고 있어서 그런 거 같은데요.”

■26세 교통사고, 10년간 칩거…“뭐라도 해야 했다”

전북 남원시에 거주하던 김선윤 소장은 1992년, 26세 나이에 교통사고로 경추를 다쳐 척수장애인이 됐다. 병원 퇴원 후 물리치료 외 10여 년간 바깥 외출이 없었던 그는 근처 장애인복지관에서 직업재활 형식의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다, 본격적으로 컴퓨터 전문 교육을 받고자 학원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손가락 겨우 하나 움직일 수 있는 김 씨가 마냥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 없어, 자원봉사 체계가 잘 되어있는 서울로 온 가족이 이사를 결심했다.

“거주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지역에서 살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때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저를 위해 평생 사시던 남원에서 서울로 오신거죠.”

서울시 도봉구를 거쳐 노원구 중계동으로 거처를 옮긴 김선윤 소장은 서울시립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을 다니면서 웹마스터 교육을 받으며,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손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그는 보조기를 낀 채 키보드와 마우스를 써야 했는데, 그래픽의 경우 워낙 섬세한 작업이다 보니, 감당이 되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

김선윤 소장(사진 맨 오른쪽)이 집단동료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에이블뉴스DB

■동료상담, 인생을 바꾼 ‘따뜻한 말 한마디’

상심에 빠져있던 김 씨가 동료상담을 접한 것은 2003년,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정립회관에서 시범적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운영,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신청 접수를 했다. “바로 전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저를 케어할 수 없으니까 활동지원을 신청하게 된 거죠.”

그런데 정립회관 측에서는 김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추가지원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면서 난감함을 표했다. “아니, 여력이 안 되면서 왜 모집을 하셨습니까?” 김 소장의 이의제기에 정립회관 직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동료상담이나, 자립생활을 들어봤냐. 세미나를 하니까 한번 방문해봐라”고 제시했다.

그렇게 자립생활 진영에 자연스럽게 발을 담그게 된 김 소장. 당시 동료상담 세미나 참가를 제안했던 정립회관 직원이 바로 현재 광주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 정희경 교수다.

“강연 형식의 세미나를 갔다가, 경기 가평에서 열리는 집단동료상담 참가 제의를 받았죠. 나는 몸이 불편해서 갈 수 없다고 했더니, 활동지원사 두 명을 연결해줬어요. ‘여행 한번 가는 셈치고 가자’ 그렇게 동료상담에 맛을 들였습니다.”

가평에서 열린 집단동료상담 참가는 김 소장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리더로 참가했던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박찬오 소장의 말 한 마디 때문이다.

“네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김 소장은 교통사고 이후 ‘왜 살지?’라는 마음이 강했단다. 먹는 것부터 싸는 것까지 남의 손에 의해 살았고, 심지어 언니로부터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너나 부모님은 고통 받지 않았을텐데’라는 모진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장애를 입고 나에게 내 삶 자체가 기쁨이라고 말해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사는 것 자체도 무의미했고, 심지어 벌레들을 보면서 ‘쟤들도 기어 다니고 밥도 먹고 똥도 싸는데, 나는 먹는 것도 못 먹고, 관장하지 않으면 배설도 어려우니 쟤들이 나보다 낫겠다’고 생각했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꾼 셈이죠.”

2016년 한자연 동료상담 운영 매뉴얼 보고대회 및 간담회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선윤 소장).ⓒ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가족 갈등 많이 토로, 발달장애 아직 어렵다

‘여행 한번 가볼까?’ 시작했던 동료상담은 일본 연수를 통해 유명인사 나까하라, 히로꼬 씨 등과 만나면서 점점 확신이 생겼다. 실제로 나까하라 씨와 동료상담 시간이 주어졌고, 그는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당시 제가 자립을 하기 위해서는 엄마 품에서 벗어나야 했어요. 엄마를 저버리고 나온다는 게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놓았고, 그녀는 ‘너만 생각하지 말고, 너 후배를 생각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렇게 2004년 1월 자립에도 성공한 겁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15년 동안 동료상담을 하고 있는 김 소장이 만난 장애인은 셀 수가 없다. 장애인들의 주 고민 사항은 가족과의 갈등 문제 였다. “기초수급비를 내 맘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거나, 자립할거면 집과 인연을 끊어라 등의 과잉보호, 비장애형제로부터 부모님을 모시라는 강요 등 다양합니다.”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발달장애인에 대한 동료상담은 고민이 많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죠. 의사소통도구를 활용해서 뭐를 먹고 싶은지 사진으로 찾기 등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해요. 처음에 아무 말도 안했던 분이 의사 표현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동료상담의 효과를 절실히 느낍니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큰 발전이거든요.”

2015년 한국동료상담사협회 발기인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김선윤 소장 모습.ⓒ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동료상담사 민간자격화 앞장, 공공일자리 목표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는 지난 2016년 5월 논란 속 한국직업능력개발원으로부터 ‘장애인동료상담사’를 민간 자격으로 승인 받았다. 김 소장은 민간자격화를 위해 TF팀 위원장으로 적극 참여해왔다.

사실 그는 10년 전 에이블뉴스 기고를 통해 ‘자격증 만든다고 전문성이 생긴다고 볼 수 없다’며 동료상담가 인증제 도입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바 있다. 그런 그가 동료상담사 민간 자격에 앞장섰다? 김 소장은 “마음이 바뀐 거다”고 인정했다.

“동료상담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당사자분들이 이야기 못 했던 부분을 털어놓고 되게 밝아지는 변화를 느꼈는데, 장애인들끼리 하소연하는 정도라고 과소평가를 받았어요. 그래서 동료상담을 보다 전문화하고, 일반고용에 진입할 수 없는 최중증장애인의 직업화를 시키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자격화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동료상담사로 배출된 인원은 약 140여명. 대부분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상근 활동가가 차지한다. 더 많은, 다양한 동료상담사를 배출하기 위해서 김 소장의 고민은 깊다.

“각 지역 통합사례관리팀이 있는데, 거기에 동료상담사가 참여해 장애인 가정의 상담 및 지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장애인일자리사업 중 하나의 직종에 포함시켜 주민센터에 당사자 분들이 자유롭게 동료상담을 진행하는 형식도 좋을 것 같고요. 장애인복지관에 의무로 배치되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공공에 동료상담사가 의무적으로 들어간다면, 동료상담사 지원자도 자연스레 늘어나지 않겠어요?(웃음).”

15년간 동료상담 활동을 진행한 은평늘봄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선윤 소장.ⓒ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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