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다고 해서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이 아니지요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아는

세월이 일깨워 준 연륜의 지혜로

판단이 그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성숙이라 함은

높임이 아니라 낮춤이라는 것을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것을

스스로 넓어지고 깊어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새벽 강가

홀로 나는 새처럼 고요하고

저녁 하늘 홍갈색 노을처럼

아름다운 중년이여!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는 12월이 오면

인생의 무상함을 서글퍼하기보다

깨닫고 또 깨닫는

삶의 교훈이 거름처럼 쌓여가니

내 나이 한 살 더하여도 행복 하노라!’

이 시는 이채 시인의 ‘중년의 가슴에 12월이 오면’이다. 이채 시인 본인이 중년에 접어들어서인지 이채 시인의 시 중에는 유독 중년에 관한 내용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로 ‘중년의 가슴에 12월이 오면’이라는 시를 골라 보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시기는 ‘청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온 젊은 날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할 만큼 아름답게 빛나지만 너무나 아픈 고통과 시련이 뒤따르는 젊은 날의 한 때에 불과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허미순 씨. ⓒ이복남

그리고 평균 수명이 늘어난 때문일까. 우리네 인생은 찰나에 지나가는 청춘의 시기와 긴 중년이 이어진 것 같다. 시인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이가 많으면 누구나 다 어른이고 그리고 어른 행세를 한다. 다만 성숙하지 못한 어른은 비움이 아니라 아직도 채움을 고집하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아픈 청춘의 시기를 지나왔을 터이지만, 허미순 씨의 청춘은 유달리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물론 세월은 청춘을 지나서 중년의 12월을 맞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청춘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허미순(1960년생) 씨는 부산 범전동에서 다섯 자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해에 많은 땅을 가진 부자로 알고 있었는데 미순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자신을 미워하고 빈둥거리는 백수였다. 어머니는 장손집안 장남의 맏며느리인데 딸만 내리 넷이라 집안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제가 8개월 때 감기를 심하게 앓았는데 열이 내리지 않아서 병원에 데려 갔답니다.”

6.25동란 이후의 부산에는 외국병원이 여러 곳 있었는데 허미순의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처음 찾아 간 곳이 어딘지 잘 모르지만 영국병원이라고 했다.

“영국의사가 폴리오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폴리오가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서야 폴리오가 소아마비라는 것을 알고 통곡했다. 우리나라에서도 6.25이후 소아마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치료약도 없다고 했다.

소아마비는 폴리오(Polio) 바이러스에 의한 신경계의 감염으로 발생하며 척수성 소아마비의 형태로 발병한다. 5세 이하의 아이가 걸리는 경향이 많아 병명에 소아(小兒)가 들어가지만, 아이만 걸리는 병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이 소아마비지만,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21년 8월 39살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꾸준한 재활 훈련 끝에 어느 정도는 걸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소아마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있어왔는데 1955년 미국 의사 조너스 에드워드 솔크(Jonas Edward Salk)가 발명한 백신으로 인해서 소아마비는 점차 감소하였다. WHO는 1994년 서유럽, 2000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아마비 박멸을 선언하였다.

나 어때요. ⓒ이복남

그러나 허미순은 8개월쯤 소아마비에 걸려서 일어서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이곳저곳을 헤맸는데 아버지는 딸 넷의 막내가 장애인이라 더욱 아이를 싫어했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온천을 자주 간 기억이 있습니다.”

범전동에서 기차를 타고 갈 온천은 어디쯤일까.

“혹시 온천장에 전차가 있었습니까?”

그랬다. 허미순 씨가 어린 시절에는 동래 온천장에 전차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에서는 전차를 기차로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아들을 바라는 심정으로 임신을 했다. 어머니는 다섯째를 임신한 배를 안고 그래도 미순 씨의 병을 고쳐보려고 조금이라도 용하다는 사람만 있으면 찾아갔다. 교회도 가고 절에도 가고 침도 맞고 탕약도 달였고 굿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동생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으려는 욕심이었는데 정말 아들이었다.

“막내가 아들이라, 저는 여자고 병신이고 집안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할머니가 계셨을까.

“제 기억에는 할머니가 안 계셨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장손집안의 맏며느리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집안 어른들한테 구박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시어머니 그리고 집안 어른들한테 핍박을 받을 때 아버지는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그나마 맞장구를 안 치면 다행이었다. 딸 넷 중에 셋째가 제일 똑똑하고 예뻤다. 아버지는 셋째 딸과 막내아들만 싸고돌았다.

“아버지가 셋째 언니와 아들만 예뻐하는 동안 저의 장애는 낫지도 않고 동생이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직업도 없이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요양 중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병약했던 것 같았다. 동생이 죽고 몇 년 후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딸 넷을 어떻게 키웠을까.

“우리 집이 땅이 넓어서 집을 새로 지었고, 엄마는 집세도 받고 하숙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네자매. ⓒ이복남

허미순 씨는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왔다. 학령기가 되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설 수는 있게 되었다. 오른쪽 손으로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짚고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씩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성지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업혀서 다녔지만 나중에는 혼자서 오른쪽 무릎을 짚고 다녔다.

“학교는 겨우 다녔지만 공부에는 별 생각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습니다.”

큰언니도 공부를 잘했지만 둘째 언니도 교대를 나와서 성지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 전까지는 잘 몰랐는지 언니가 선생이 되면서 동생 허미순에게 목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학교에 지체장애인을 위한 목발이 배당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 같은 사람에게 목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발을 받고 보니 정말 날개를 단 것 같았다. 그러나 날개는 그만의 것이었다. 목발을 짚기 전부터 학교를 오가는 길이나 학교에서도 몇몇 친구들은 그를 따라다니며 놀렸다. 친구들이 뭐라고 놀렸을까.

“절뚝발이 병신이라고 놀리면서 어떤 아이는 흉내를 내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데 어떤 때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3학년 때 목발이 부러져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몇 년 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목발이 부러졌으니 당장 걸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고마운 목발이었는데 부러지다니, 너무나 안타깝고 애석했다.

당시 즉 70년대 무렵은 그야말로 나무로 만든 목발이었다. 목발은 처음부터 나무로 만들었기에 나무로 만든 다리 즉 목(木)발이라고 한 것 같다. 한자는 협장(脇杖)이라고 했으며, 얼마 후부터는 영어인 크라치(crutch)가 통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목발이라는 이름은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지만 90년대 이후에는 나무 대신 알루미늄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10여 년 전부터 아예 나무목발은 없고, 알루미늄목발이나 스텐목발이 나오더니 얼마 전부터는 티타늄목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발은 대체로 두 짝을 쌍으로 사용하는데 간혹 한쪽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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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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