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닐 때는 나중에 졸업하면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집이 가난해서 빨리 어른이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흥미 있는 과목이 있지는 않았을까. “역사는 재미가 있어서 삼국지는 책도 읽고 영화도 봤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실습을 나갔다고 했다. 부산구화학교는 중학교까지 밖에 없어서 학교에서 실습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테고 그가 나이가 많다보니 학교에서 취업 알선을 해준 모양이다.

송상춘 씨. ⓒ이복남

그가 간 곳은 사하구 구평에 있는 가구공장이었는데 선박가구를 만들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7~8만 원 쯤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저는 도장부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가구에 빼빠질을 했습니다.” 도장부에서 그가 하는 일은 색이 잘 칠해지도록 가구를 매끄럽게 하는 사포질이었다. 선박가구도 선반 침대 옷장 캐비닛 등 일반 가구와 거의 비슷했다.

열심히 보고 배워서 1년 만에 그도 가구에 칠을 하기 시작했다. “팀장이 색을 배합을 해 주면 후끼로 색을 칠했습니다.” 페인트 후끼란 현장에서 많이 쓰는 분사방식의 페인트 건이다. “처음에는 하도로 하고 나중에 상도를 합니다.”

목재 도장은 하도 중도 상도 등의 작업방식을 거치는데 일종의 작업순서라고 할 수 있다. 페인트 칠은 먼저 하도로 초벌을 하고 그 다음에 중도 또는 상도를 칠한다. 상도란 본래의 칠이고 하도는 상도를 하기 위한 초벌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짝을 예로 들면 한 번에 50조 즉 100개의 문짝이 나오는데 하도로 초칠을 하고 하루가 지나면 다시 사포질을 하고 그 다음에 상도로 칠을 하는데 칠을 하고 말리고 다시 칠하고 해서 완성이 되려면 일주일 정도는 걸린다고 했다.

직원은 40명쯤 되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회식을 했다. “1차는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를 마셨고 2차는 맥주 3차는 노래방에 갔는데 당시에는 노래도 잘했습니다.”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희나리 남행열차 짝사랑 등을 잘 불렀단다.

동래구 명장동에서 사하구 구평동을 가려면 버스도 2~3번은 갈아타야 되는데 출퇴근은 어떻게 했을까. “집에서 회사까지 2시간 쯤 걸려서 아침 6시에 집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출퇴근은 아니란다. 기숙사에 살면서 주말에만 명장동 집에 갔다고 했다.

이소룡의 정무문. ⓒ네이버 영화

그동안 사귀는 여자는 없었을까. “우리 공장에는 아줌마들이 많았고 아가씨 들이 몇이 있기는 했지만 저하고는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인연이 아니라는 것은 결국 그의 짝사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젊은 아가씨는 만날 시간도 없었다면 다른 취미는 있었을까. “주말에는 공장 친구들 하고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무술영화를 좋아했고, 이소룡 영화는 다 봤습니다.” 이소룡은 절권도를 창시한 무술인이며 쿵푸 영화를 혁신한 영화배우인데 1973년 7월, 32살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소룡이 죽기 전에 만든 영화는 총 5편인데 맹룡과강, 용쟁호투, 당산대형, 정무문, 그리고 마지막 작품 사망유희는 유작이다.

“월급을 타면 용돈 몇 만원 외에는 전부 다 엄마 드렸습니다.” 명장동에 살 때는 기숙사에 살면서 주말에만 집에 갔는데 이사를 했다. “엄마가 그동안 모은 제 월급하고 은행 대출도 좀 받아서 청학동에 빌라를 하나 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예전에 살았던 곳은 청학 1동인데 새로 이사 한 곳은 청학 2동이었다. 새집에 이사도 했고,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송상춘 씨가 돈을 벌기 때문에 행복했다던 17년의 행복은 끝이 났다. “2010년 겨울이었습니다.” 12월의 찬바람과 함께 그의 꿈도 행복도 다 날아갔던 것이다. “아줌마랑 같이 완성된 가구를 양쪽에서 잡고 옮기고 있었는데 아줌마가 손이 미끄러졌는지 들고 있던 가구를 놔 버렸습니다.”

책장 같이 제법 큰 가구였는데 그는 가구와 같이 미끄러져 가구에 깔렸다. 가구에 깔리면서 몸이 부서졌고 그의 행복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기절했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처음에 가까운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봉생병원에 입원해서 MRI를 찍었다. 처음에는 뇌진탕이라고 했다. 머리가 아프고 귀가 윙윙거렸는데 병원에서는 병명이 안 나온다고 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겼으나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도 해동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집이 영도였기에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던 것이다. 머리도 아팠고 목도 아팠고 다리도 아팠고 특히 귀가 윙윙거렸다. 온 만신이 아팠기에 병원에서는 오랫동안 물리치료를 했다. “2~3일에 한 번씩 엄마가 왔습니다.” 그는 옛날 사진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이사하면서 짐을 다 정리해서 없앴다는 것이다.

지인의 사무실에서. ⓒ이복남

“병원에는 1년 6개월 쯤 있었습니다.” 병원비는 산재로 처리를 한 것 같은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보상비는 한 푼도 못 받았단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퇴원 후에는 청각장애 4급을 받아서 중복장애 2급이 되었다. 당시 누나는 결혼을 했고 동생은 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사업이 잘 안된 모양이었다.

“엄마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고 다시 명장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명장동에서는 차상위가 되어 임대주택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면 아버지의 폭력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도 나이가 들어서 예전처럼은 아니었지만 하루는 술이 취해서 어머니를 때리려고 했다. “옛날에는 맞고 살았지만 제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를 실컷 뚜드리(두들겨) 팼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도 더 이상은 어머니나 그를 때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의 눈치를 본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폭력적인 남편과 장애인 아들 때문에 속만 썩이다가 몇 년 전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현재는 80이 넘은 아버지와 같이 산다면서 아버지의 건강은 어떠실까. “엄마가 아버지한테 그래 맞으면서도 아버지 몸 낫게 하려고 하도 보약을 많이 해 먹여서 아버지는 오래 살 겁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혼자 어떻게 사나 싶어서 막막하단다. 그래서 요즘은 지인들이 여기저기서 중매도 하고 선도 보는데 아직은 인연이 안 되는 모양이라고 했다. 되면 좋고 안 되어도 즐겁고 행복하단다. 송상춘 씨, 아무쪼록 좋은 인연 만나 행복할 수 있기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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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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