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오른손으로 오른쪽 무릎을 짚고 다녔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체육시간에는 교실지킴이를 했다.

“저는 아니었습니다. 축구 야구 등 달리기 빼고 운동은 다 잘했습니다.”

이상하다. 야구는 치고 달리는 운동이 아니던가. 야구는 9명씩으로 편성된 두 팀이 9회에 걸쳐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면서 각 루(베이스)를 돌아 얻은 득점으로 승패를 겨루는 경기이다.

“야구에서 투수도 하고 포수도 했는데 공을 치고 베이스를 달리는 것은 다른 친구가 해 줬습니다.”

고향 바닷가에서. ⓒ이복남

야구는 주로 방과 후에 했는데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도 그의 장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가 공을 치고 나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신 달려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안 보는데서 놀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직접적으로 놀리는 애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도 잘했으나 달리기 만 못했다. 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뛰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장애를 원망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 때는 몰랐지만 요즘 얘기로 하자면 뛸 수 있는 아이들과 다를 뿐이었다.

너는 잘 뛰고 나는 못 뛰고……. 그 뿐이었다. 달리기 외에는 특별히 장애를 느끼지도 않았다면 나중에 커서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꿈이랄까 장래 희망은 같은 것 말이다.

“없었습니다.”

꿈이 없었다는 그의 대답은 필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외가와 왕래가 잦았다. 외삼촌이나 이모 등 외가가 쟁쟁했는데 그를 많이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는 장애가 있으니 전파상을 하라”고 했다.

임병기 씨 가족. ⓒ이복남

그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서 그의 장래까지 결정지어버렸기에 그도 그러려니 거기에 순응했다.

“커서 전파상을 할 건데 무슨 꿈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학교에서 소풍은 대부분이 송림 백사장으로 갔는데 그도 소풍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장항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모 공업고등학교 전자과에 입학해 혼자 자취를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 왔던 터라 자취는 할만 했다.

졸업 후에는 전자와 관련된 일을 해보려고 전자학원 및 텔렉스학원을 다녀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쉽사리 취직이 되지 않았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그의 장애가 그야말로 장애였다.

그 무렵 식구들이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외삼촌이 부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광복동에 살았는데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그런 잡화 가게였다.

그도 뭐라고 해야겠다 싶어 물색하던 중 장애인에게 표구를 가르쳐 준다는 사람이 있었다.

“친구와 같이 두실까지 표구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1년 쯤 표구를 배우고 친구 아버지가 도배장판을 하고 있어서 그 점포 한편에서 표구가게를 내어 사업을 시작했지만 승산이 없어 보였다. 장사가 안 되었던 것이다.

해운대 구청장배 우승. ⓒ이복남

당시 자형이 전라도에서 방역회사를 했는데 자형 회사에 가서 방역 일을 도우기도 했다. 그 때 어느 지인이 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이라며 권한 것이 철학관이었다. 그가 생각해도 그럴 듯 했다. **철학관에서 6개월간 공부를 했다. 사주관상과 작명을 배웠다.

“그 때 조카들 이름도 제가 지어 줬습니다.”

주변에서는 이름도 잘 짓고 사주관상도 잘 맞는다고 했다. 그럴 즈음 부동산 관련으로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이 많은 사람들의 소일거리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복덕방이 관련법이 제정되어 공인중개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아파트 즉 공동주택이 지어지면서 연줄이나 친분으로 들어갔던 아파트관리소장도 주택법(현 공동주택관리법)이 재정비 되면서 주택관리사가 담당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주택관리사가 유망하다는 것이다.

“주택관리사가 괜찮을 것 같아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서 서면 **학원에 등록을 했다. 시험과목은 1차와 2차로 나누는데 1차 시험은 3과목으로 민법, 회계원리, 공동주택시설개론 등이 40문항으로 출제되는데 40점 이하의 과락이 없고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이었다.

1차 합격자에 한 해 3개월 후에 2차 시험이 치러지는데 2차 시험은 2과목으로 주택관리관계법규와 공동주택관리실무라고 했다. 6개월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곧 시험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웬일인지 차일피일 하더니 1년 후에야 시험을 쳤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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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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