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부터 아버지는 약간의 연금을 받았고 아프실 때는 보훈병원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국가유공자가 저하고는 별 상관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봉제공장을 다녔고 그는 여전히 자동차부품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4월 21일! 꿈에도 잊히지 않는 날이었다.

“쇼바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시일이 촉박했습니다.”

프레스작업을 할 때는 자동제어장치가 있었다. 프레스 기계가 올라 간 후, 그 안에 재료를 넣고 나면, 프레스가 내려와서 금형대로 제품을 찍고, 다시 기계가 올라가면 손을 넣어 완성된 제품을 끄집어내는 시스템인데 자동제어장치가 있어서 하나 둘 셋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주문이 밀려 있어서 자동제어장치로 하나 둘 셋을 셀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공장장은 바쁘다면서 자동제어장치를 끄고 작업을 하라고 했다. 그런대로 작업을 잘하고 있었는데 완성품을 꺼내려고 손이 들어 간 순간 프레스가 내려와서 그의 왼손을 눌렀다.

악! 그의 비명소리에 누군가가 프레스는 중지를 시켰으나 그의 손가락은 이미 뭉개진 후였다. 그는 주변의 부축을 받고 근처 강동병원으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손이 없다고 합디다.”

그저 망막할 뿐 아무생각이 없었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왔다. 아내가 안 오고 왜 어머니가 왔을까.

“집 사람은 직장에 있으니까 엄마가 오신거지요.”

아이고, 이놈아, 니가 와 다쳤노, 다리도 성치 않는데 손까지 다치다니……. 어머니는 통곡했다. 그런데 어머니 보다 더 서럽게 운 사람이 있었으니 자동제어장치를 끈 공장장이었다.

“내가 그 기계만 안 껐어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공장장은 그 작업을 괜히 했다면서 자책했다.

“그 때는 공장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었습니다.”

영도복지관의 인조잔디에서. ⓒ이복남

손가락은 프레스에 뭉개졌으므로 접합도 불가했고 그래도 의사들은 조금이라도 손가락을 살려 보려고 했는지 서너 차례 수술을 했다. 왼손의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네 손가락과 엄지의 손톱부분이 다 잘렸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으나 나중에는 손가락이 잘렸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몸부림쳤다.

“그 때는 죽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의 사지는 침대에 묶었고 회사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지켰다. 밤에는 아내와 애들이 오긴 했지만 그는 할 말이 없었다. 3개월 만에 퇴원은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리도 병신인데 이제는 손까지 병신이라니, 이래 살아서 뭐하나 싶었습니다.”

맨정신일 때는 어떻게 죽을까 죽는 방법에 골몰했고 밤이면 술을 마셨다. 만사가 귀찮았다. 아침이면 아내는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혼자 남았다. 태종대 자살바위에도 가보고 영도다리에도 몇 번이나 갔다.

“영도다리 난간에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살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어떻게 살까. 저 물에 뛰어들면 물은 차가울까. 헤엄을 잘 못 치니까 바로 가라앉겠지. 그 후 내 시체는 누가 어떻게 찾을까.

“죽을 용기도 없어서 몇 번씩이나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 영도구장애인복지관에서 안내문이 왔다. 매일 하릴없이 죽는 방법만 찾아 헤매던 터라 어슬렁어슬렁 영도구장애인복지관을 찾아 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복지관에 갔는데, 조금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왜, 무슨 일로 마음이 놓였을까.

“복지관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 보다 더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삼락공원 파크골프장에서. ⓒ이복남

이 사람들도 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럴까.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죽음대신 컴퓨터교실을 신청했다. 그리고 왼손장애를 4급을 받아 중복장애 3급이 되었다. 그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씩 배워보니 재미가 있었다. 컴퓨터교실은 6개월 과정이었는데 컴퓨터가 끝날 무렵 복지관 창밖에서 공을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알고 보니 파크골프였습니다.”

복지관 인조잔디에서 연습을 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삼락공원 파크골프장으로 간다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운전을 못했다. 복지관에서는 시간마다 셔틀버스가 관내지역을 다녔다는 것이다. 컴퓨터교실을 끝내고 파크골프를 시작했는데 복지관에서 일주일에 한번 밖에 삼락공원을 안 가므로 영도에서 삼락공원까지는 차편이 마땅찮았다.

“그래서 운전을 배우고 승용차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컴퓨터도 배우고 파크골프에 재미도 붙였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의 그런 변화를 잘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제가 말도 잘 안했고, 부모님 연세도 높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절망에서 헤매는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었던지 어느 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형이나 동생은 타 지역에 살았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였기에 어머니도 보훈병원을 이용할 수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보훈병원을 제대로 이용해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아버지도 그때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시면서 날마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2년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제가 운전을 하게 되어 아버지를 보훈병원으로 자주 모시고 갔습니다.”

부산보훈병원은 사상구 주례동에 있다. 영도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보훈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렇게 보훈병원을 왔다 갔다 하시다가 치매가 온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도 요양병원에 모셨으나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다. 그동안 그는 부모님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셔서 현재는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다.

“생각하면 집사람이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자라서 각자의 길을 걷고 있으나 아내는 아직까지 봉제공장을 다니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가족뿐이니 예전에 배웠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집안을 화목하게 하려고 노력한단다. 이제는 아내가 몸도 안 좋은 것 같아서 좀 쉬게 하고 자신이 뭐라도 해 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그의 장애로는 마땅치가 않단다.

필자도 파크골프 회원이므로 이상조 씨를 알고 있다. 몇 해 전 아버님 장례식을 치를 때도 아버님이 국가유공자라서 보훈병원장례식장을 이용할 수가 있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야 아버지가 6.25 전상자지만 아버지는 정년이 지난 후에야 국가유공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찌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살다보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던 것이다. 말이 없고, 착하고, 그래서 때로는 손해도 보는 이상조 씨, 그러나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으니 지금 여기에서 가화만사성해서 행복할 수 있기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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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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