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니 이웃에서 아는 형이 그를 데려간 곳이 옥성고등공민학교였다. 그 형을 따라 학교를 다녔으나 영어나 수학은 재미없었다. 그렇다면 관심 있는 과목은 무엇이었을까.

“한문시간은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배웠다. 당시만 해도 신문은 대부분이 한문이었는데 한문을 배운 덕분에 신문은 읽을 수가 있었다. 한자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을까.

“한문교과서가 따로 있었는데 나중에 사자성어를 배우면서 가화만사성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한자성어인데 이상조 씨 가족은 화목하게 살았을까.

“사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자신의 장애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어렸을 때는 자신의 장애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탓인 것만 같았다. 결국 자신만 손해겠지만 부모님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런데 한문을 배우면서 가화만사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님과의 화목은 잘 모르겠지만 철이 들고 나서 직장은 성실하게 다녔고, 결혼 후에는 우리 가족이 최우선이었습니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야간대학을 다녔다. 그는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금은방에 취직을 했다. 당시 소아마비 장애인들은 대부분이 다리는 불편하지만 양손은 사용할 수 가 있었으므로 금은세공, 자개, 전자기기 수리 등 정밀작업에 종사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장애인들이 잘 할 수 있었던 정밀작업이 세월의 뒤편으로 밀려나는 한 편 양손을 사용할 수 있는 장애인도 점점 줄어들었다. 소아마비가 사라진 대신 질병이나 사고 그리고 산재로 인한 장애인들은 양손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상조 씨는 금은방에 취직을 했고 동생은 대학진학을 위해서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집안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만한 재력이 있어야 가능했기에 형도 주경야독으로 야간 대학을 다녀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상이용사라면 국가유공자가 되어 대학까지 학비가 무료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몰랐지요. 그런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국가유공자가 되었을 겁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해 보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군대 간 증명서가 없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범일동 금은방에서 한 일 년쯤 시다바리(견습공)를 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었습니다.”

설악산 신혼여행. ⓒ이복남

두 번째로 간 곳은 좌천동 자개공장이었다. 자개공장에서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견습생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다음에 간 곳이 남포동 양화점이었다.

“제가 하는 일은 구두 밑창이었는데 제법 오래 다녔습니다.”

1979년부터 몇 년 동안 양화점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왜 그만 두었을까.

“저희는 수작업을 했는데 기계화가 되면서 일거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얼마간 놀다가 이번에는 가방공장에 취직을 했다.

“말없이 성실하니까 취직은 잘됩디다.”

그러나 주변에 이렇다 할 말동무도 없고 또 재잘재잘 하는 성격도 아니므로 퇴근하면 직장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인생사는 것이 재미도 없고 그냥그냥 살다보니 일 년에 절반쯤은 술에 취해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형은 결혼을 해서 다른 도시에 나가 있었고, 동생도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집에는 부모님과 그만 있었는데 부모님도 별 말이 없었지만 그도 부모님과 별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 가슴속에는 부모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날마다 취해서 들어오는 장애인 아들이 안쓰러웠다. 장애인 등록은 초창기 때 4급으로 등록을 했다. 어쩌면 스스로가 장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루는 엄마가 선을 보라고 합디다.”

그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하도 어머니가 간절하게 부탁을 하므로 아가씨를 만났다. 다방에서 아가씨를 만나서 인사는 했다. 그 뿐이었다. 그도 말이 없고 아가씨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만 지키다가 헤어졌다. 어머니가 어떻더냐고 물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까요.”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물론이고 결혼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침이면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갔다가 저녁이면 술에 절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잠자는 곳에 불과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어머니가 안달복달 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봤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만났던 그 아가씨였다.

“인연이라 생각하고 만나보니 그런대로 맘에 듭디다.”

그렇게 만난 아가씨가 지금의 아내 김미수(1964년생) 씨다. 김미수 씨는 청각장애 2급인데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처음에는 잘 몰랐단다. 그리고 김미수 씨가 쌍둥이의 동생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어느 여름날의 파크골프장. ⓒ이복남

그 때가 서른이었다. 결혼을 해서 이제 가장이 되었는데 그가 다니던 가방공장이 문을 닫았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사하구 신평에 있는 대우자동차 협력업체에 취업을 했다. 회사는 자동차부품으로 에어백과 쇼바 등을 생산했다.

그동안 아내는 큰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 두었었다. 아이 둘을 키우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다시 봉제공장을 다녔다.

“아버지가 남항동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셨는데 정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을 하다가 그만 두시니까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고향 청도와 보훈청을 오가며 6.25 때 참전한 기록이며, 강원도 어느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전상기록들을 찾아냈다. 그제야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등록했다.

“국가유공자가 되면 자식들은 대학까지 학비는 공짜고 나라에서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던데……. 우리는 공부도 다 끝났는데 할 수 없지요.”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라면 학비지원은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러나 지원내용이 소급되지는 않는다. 학창시절 그는 부모님의 짐이 되기 싫어서 아예 공부를 포기했었고, 형과 동생은 고학을 하다시피 대학을 갔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서로 말하지 않았고 잘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억울했지만 이미 흘러간 세월이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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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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