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눈을 감은 김서방이 살고 있었다. 이웃에 비장애인 박서방이 살고 있었는데 박서방은 성질이 고약했다. 박서방은 김서방이 앞을 못 본다고 괄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김서방이 앞을 못 보니까 자기 마음대로 골려 먹었다.

김서방 논의 물꼬를 막아서 자기 논에 물을 대기도 하고, 김서방 집에 놀러 와서는 삽이나 호미 등 세간살이를 하나씩 들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서방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매번 당하기만 했다. 몇 년을 그렇게 당하다보니 김서방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박서방에게 분풀이를 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한 김서방은 마침내 묘한 꾀를 하나 냈다.

김서방은 아무 것도 안 쓴 백지 한 장을 구해다가 그것을 다른 종이로 쌌다. 정성스럽게 싸서 노끈으로 가로세로 묶고, 그걸 또 다른 종이를 싸서 묶었다. 또 보자기로 싸서 묶고, 이렇게 계속해서 싸서 묶고 그것을 또 새끼줄로 이리 묶고 저리 묶고 사방팔방 묶어 놓았다. 백지 한 장은 이불보만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보물보따리였다.

눈뜬 사람을 속인 장님. ⓒ네이버 책

김서방은 그렇게 묶어 놓고 박서방을 찾아가서 돈 받으러 왔다고 했다.

“내 돈 백냥을 빌려 가면서 증서까지 만들어 주지 않았소?”

박서방이 돈 백 냥을 빌려 쓰고 증서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서로 빌려 갔네, 아니네 하다가, 결국에는 송사를 하게 되었다. 고을 원님한테 갈 때 김서방은 그 백지 한 장을 싼 이불보따리만한 것을 짊어지고 갔다. 김서방은 원님 앞에서 엎드려 하소연을 했다.

“눈뜬 사람이 내 돈 백 냥을 빌려 쓰고 이제 와서 못 주겠다고 하니 너무 억울하옵니다.”

박서방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김서방은 이불보따리만한 백지 한 장 싼 것을 증서라며 내놨다. 원님이 그 놈의 보따리를 한나절이 걸려 벗겨냈지만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안 쓴 백지 한 장이 나왔다. 그래서 김서방에게 아무것도 없는 백지라고 말하자 김서방은 그만 땅바닥에 엎어져서 떼굴떼굴 구르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속았구나. 저 사람이 이 증서를 줄 때 돈 백 냥 빌린 것 다 적고 도장까지 벌겋게 찍었다고 하더니 백지를 줄 줄이야. 아이고, 이제 나는 망했다.”

김서방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일이 이쯤 되자 원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저 눈뜬 박서방이 눈감은 김서방을 속인 게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고얀 놈. 어디 속일 데가 없어 앞 못 보는 사람을 속였더냐? 당장 김서방에게 돈을 갚되, 이자까지 쳐서 백오십 냥을 갚으렷다. 또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눈감은 사람을 속이지 말라.”

박서방은 원님의 호령이 억울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제가 저질러 논 잘못도 있어서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서방의 꾀에 원님도 속고 눈뜬 박서방도 속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눈뜬 박서방이 생돈 백오십 냥을 물어주게 생겼는데 그 때 눈감은 김서방이 찾아왔다.

“그 동안 몰래 가져간 물건이나 되돌려 주고, 우리 논에 물꼬만 가만히 놔둔다면 내 그 빚을 몽땅 탕감해 주겠소. 그러니 딴말하지 마시오.”

눈뜬 박서방은 그저 감지덕지 했고, 눈감은 김서방은 잃은 물건 도로 찾고 농사도 잘 짓고, 눈뜬 사람의 버릇도 고쳐서 잘 살았다고 한다.

이종길 씨. ⓒ이복남

이 이야기는 전래동화로 한국원형백과에 나오는 ‘눈뜬 사람을 속인 장님’이라는 설화를 필자가 각색한 것이다. 마음씨 고약한 눈뜬 박서방이 눈감은 김서방을 골려 먹다가 오히려 된통 당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원님의 명쾌한 판결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옛날이야기지만 현대에도 눈뜬 사람이 눈감은 사람을 골탕 먹이는 사건은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김서방 같은 묘한 꾀도 없고, 명쾌한 판결을 내리는 원님도 없다보니 눈감은 사람이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수많은 김서방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다.

이종길(1950년생) 씨는 6.25 전쟁의 난리 통에 경상남도 삼천포의 작은 딱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 뱃사람이었지만 일찍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나 황달이 들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 가셨다.

나이어린 어머니는 조그만 섬에서 홀로 아들 둘을 키울 수가 없어서 신섬에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아들 둘을 양자로 보내고 도시로 나가 식모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가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신단다.

이종길 씨의 청년시절. ⓒ이복남

“저는 형과 같이 늑도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신섬에서 늑도국민학교까지는 노 젓는 배로 다녔다. 아침이면 늑도에서 배가 왔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열댓 명이 그 배를 탔고, 저녁이면 다시 신섬까지 데려다 주었다. 배는 누구 배였을까.

“우리 배는 아니고 늑도에서 돈을 받고 운영하는 배였는데 뱃삯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는 가는 날보다 안가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비오고 바람 불면 학교를 못 가므로 일기예보에 신경을 써야 했다.

“날이 새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은 배가 오는지 걱정부터 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큰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고기 잡는 어부인 큰아버지도 날씨가 안 좋으면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기를 잡았지만 큰아버지도 가난했다. 그는 늑도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중학교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배를 타야 했다.

늑도국민학교는 1944년 4월 1일에 개교하였다. 한 때 초양분교와 신도분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어 1996년 3월 늑도초등학교로 개칭했으나 1996년 9월에는 삼천포초등학교 늑도분교가 되었다가 2006년 폐교하였다.

외항선 선원시절. ⓒ이복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장어 주낙배를 탔습니다.”

주낙은 동그란 대야모양의 채롱에 담긴 모릿줄에 250개 정도의 아릿줄을 달고 아릿줄 마다 낚시 1개씩을 달아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고기를 잡은 어구를 말하며 연승(延繩)이라고도 한다.

그가 타는 배는 삼천포 선적이었는데 제주도 근해로 조업을 나갔다. 처음 배를 탈 때는 너무 어려서 배에서 잔심부름 등을 했는데 차츰 일을 배워 나갔다. 그 때는 월급이란 것이 없고 배가 한 번 나갔다오면 그동안 잡아온 장어를 팔아서 선장 등 기여도에 따라서 배분을 했다. 따라서 그가 받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군대 갈 때까지는 그렇게 장어 주낙을 했습니다.”

제대를 했으나 장어 주낙은 돈이 안 되었으므로 더 넓은 바다로 나가서 큰돈을 벌고 싶었다.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더니 학력이 너무 부족했다. 여기 저기 물색을 해보니 여수선원양성소를 나오면 선원증을 발급 받아 원양어선을 탈 수 있다고 했다. 6개월 과정으로 여수선원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원양어선을 탔다.

“인도양 등으로 나가는 참치어선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이가 들어 주변에서 혼처를 주선했다.

“아가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섬에 있을 때의 친구동생이었습니다.”

박한순(1955년생) 씨는 그렇게 만나서 결혼을 했다. 3년쯤 원양어선을 타다가 결혼 후 아내는 첫딸과 둘째아들을 낳아 기르고 그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대일선을 탔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