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아서 발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노랫말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 같은 노래들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렇게 노래 가사를 적었지만 그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 때 노래 가사를 적은 노트가 몇 권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노랫말이나 지어 볼까 싶어서, 한 때 작사가나 시인이 되려고 했었다. 그렇다면 시를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모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공부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 김밝은터. ⓒ김밝은터 갤러리

노천명의 ‘사슴’을 좋아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에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 몇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아래 시는 그의 시 ‘사진첩’이다.

‘사진첩

추억을 펼쳐본다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있는

조각 조각 조각들

나는 이렇게도 변치 않고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도 많이 변했느냐고 야단친다.

맑은 눈망울 부드러운 피부였는데 지금 너의 눈빛은

욕망이 가득찬 탁한 눈빛이고 거친 피부는 모진 풍파에

많이 시달렸음을 알 수 있구나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소박하고 검소한데 너는 왜 그렇게 사치스럽고

뻔뻔해졌냐고 힐책 하네

또 다른 조각을 펼쳐본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하고 희망찼는데

너는 왜 그렇게 게으르고 의욕이 없냐고 한심스러워한다.

조각 조각 조각들…….’

당시만 해도 나이 스물에 뭐라도 해야겠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뭘 해 볼까 고민했다. 그가 해볼 만한 것은 웅변, 서예, 그림 등인데 모두가 학원에 다녀야 했다. 사실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기초만 서너 달 배워 집에서 혼자 하면 되겠지 싶어 물색 하던 중 초상화 화실을 발견했다. 선생은 그를 보더니 난감해 했다. 그 때가 여름이었는데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선생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은 그런 저를 보더니 차라리 그림을 그려보라면서 화실 하나를 소개해 줍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선생이 김용달 화백인데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용달 선생도 처음에는 황당해 하시더니 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고 물었다.

“발로 그립니다.”

선생님은 조그마한 반마스크 하나를 주시면서 집에서 데생을 해 오라고 했다. 데생을 해서 선생님에게 가져가니 잘 했다면서 또 다른 숙제를 주셨다.

스승과 제자. ⓒ김밝은터 갤러리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당시만 해도 미대 준비를 하는 아이들은 그런대로 살만한 집 아이들이고, 미술학원은 회비도 제법 비쌌다. 나름대로 기초 서너 달은 배울 예정이었으므로 한 달이 지나 선생님에게 회비를 드렸다. ‘니 한테는 안 받을 테니 회비 걱정하지 말고 나오너라.’

“선생님은 제 사정을 어찌 아시고 회비도 안 받겠다고 하시는지 목이 메었습니다.”

그래도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얼마 후에는 조그만 화분을 하나 사들고 갔는데 다음부터는 그런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제게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연습이었다. 하루 종일 발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다. 붓을 잡고 용을 쓰다 보니 어떤 때는 발가락에 쥐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는 혼자서 그리지만 큰 그림은 좀 높은 곳에 앉아서 그려야 되므로 의자나 탁자 등을 올려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요즘은 활동보조인이라는 제도가 있어 저도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신청을 해 봤는데 하루에 몇 시간은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도 포기를 하고 필요한 것은 동생들이 도와준단다.

처음 김용달 선생님에게 기초를 배우고 혼자서 피나게 노력했었다. 그 때가 1975년이었다.

“김용달 선생님과 그렇게 만났는데 벌써 40년이 되어 2015년에는 스승과 제자전을 부산에서도 하고 국회의사당에서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밝은터·김용달 2인전도 했다. 처음에는 그는 화실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집에서만 그렸다. 발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그에게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하자, 하루는 한 학생이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을 해야 된다면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네 솜씨를 못 믿겠으니 자기가 보는 앞에서 직접 그려 보라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그날 처음으로 그 학생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친구는 감탄했고, 그 후부터 그 친구하고는 오랫동안 잘 지냈다. 그 친구는 홍익대를 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끊어졌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 다닐 때도 무거운 가방은 들기 어려우므로 친구들이 들어 줬다. 화실에서도 가벼운 종이나 붓 등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가 있었으나 무거운 캔버스나 이젤, 화구통 등은 누군가가 들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전 방송. ⓒ김밝은터 갤러리

김용달 선생님은 교사였는데 교사 과외금지령이 내렸다.

“선생님의 화실에서 사모님이 어린이 미술교실을 운영했습니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사모님도 그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셨는데 아이들이 돌아 간 밤에는 미술학원은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갔다 오는 날이면 사모님이 챙겨주시는 간식거리가 산더미 같았습니다.”

선생님과 사모님 덕분에 그는 무료로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가난했다. 아래로 동생들이 태어났고 부모님은 조그만 빵가게를 운영했지만 그가 돈을 번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성당은 언제부터 다녔을까.

“병원에서 성당가자는 사람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다녔습니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고 밤이면 선생님의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바람과 그리움 그리고 동경의 대상은 손과 세계여행이었다.

그는 주로 창조적인 추상화를 그렸는데 그에게는 까마득한 꿈에 불과했기에 어느 날 부터인가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은 유능한 도구이고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나뭇가지, 나뭇잎, 꽃, 과일, 덩굴손 등의 초목들도 동경했다.

그러나 동경하는 것들은 이들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손을 갈망했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그 도구를 다시 갖고 싶어 함은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잘 모를 것이다.

김밝은터의 꿈꾸는 나무. ⓒ김밝은터 갤러리

그가 꿈꾸는 나무, 그것은 손이었다. 그의 화폭에는 손과 팔을 닮은 꿈의 형상들이 애절하고 그리고 처절하게 펼쳐졌다.

“처음에는 손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손에 대한 기피이자 외면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우연히 손을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부러워만 하고 있을 건가 싶었다.

“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明基(명기)를 한글로 '밝은터'라고 풀었더니 사람들이 훨씬 잘 기억하더군요.”

정말 연애는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20대에는 생각도 못해 봤는데 30대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취직이나 아니면 그림을 팔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우연히 구족화가협회에 가입했더니 장학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족화가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입(口)이나 발(足)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말한다.

빈 세계구족화가협회에서. ⓒ한국구족화가협회

독일인 에릭 스테그만은 소아마비로 팔을 쓰지 못하던 구족화가였다. 그는 장애로 인해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실력이 있음에도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을 적선이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스테그만은 1950년대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1956년 중부유럽 구족화가들을 모아 구족화가협회(AMFPA)를 설립했다. 본부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리히텐슈타인공화국에 두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는 전세계 70개 국, 700여 명의 재능 있는 구족화가들이 활동하는 국제적인 모임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1985년 구필화가 김준호 씨가 처음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활발한 작품 활동에 감명 받은 구족화가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그 수가 7~8명으로 늘어나면서 1992년 1월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현재 한국에서는 구필화가 14명과 족필화가 8명, 도합 22명이 국내에서 활동 중이란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발췌-

“돈이 생기니까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구족화가협회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먹고 살만큼은 된다고 했다. 그 때부터 주로 손과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 바 꿈꾸는 나무였다. 그리고 먹고 살만해지자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는 제게 별로 관심이 없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먹고 살만해 지니까 눈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여자 다음으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대학생이었다. 예전에는 대학생이 부럽기만 한 존재였는데 그에게도 약간의 여유가 생기니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중입 검정고시를 치고, 고입을 치고 대학생이 되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살다보니 일본 사람들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방송통신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일어를 배우려고 입학했는데 일어보다는 문법이나 역사 등 다른 데 시간을 다 뺏기는 것 같아서 대학은 아직도 졸업을 못했단다.

김명기 후원자. ⓒ플랜코리아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플랜코리아(PlanKorea)에 대해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쳐다보다가 양친회라는 말에 그야말로 귀가 번쩍 띄었다. 아! 양친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양친회가 뭘까?

“어릴 때 저를 후원해 주던 데가 양친회라고 했습니다.”

양친회란 플랜코리아의 한국이름이다. 플랜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존 랭던 데이비스(John Langdon-Davies)와 그의 친구 에릭 머거리지(Eric Muggeridge)에 의해 1937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종군기자로 참여하였던 존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포스트 페어런츠 플랜(Foster Parents Plan)'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 플랜의 활동목표는 스페인 내전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에게 음식과 쉴 곳, 그리고 교육을 지원해 주는 국제구호개발 NGO 단체였다.

플랜코리아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양친회(養親會)라는 이름으로 활동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플랜은 전세계 후원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각국에서 전달된 후원금으로 매년 2만 5천여 명의 한국 어린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플랜코리아에서 발췌-

그는 1964년부터 양친회를 통해 스웨덴의 양부모로부터 후원을 받았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우연히 플랜을 알게 되어 동남아 지역 어린이를 위해서 약간의 후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스웨덴의 양부모님이 보내준 엽서를 보면서 외국여행의 꿈을 키웠어요. 꿈이라기보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동경이었죠.”

엽서에 있는 이국적인 모습들을 보면서 저기 한 번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살기도 힘든데 언감생심 외국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단독으로 하는 전시회는 물론이고 그의 그림을 한 점 또는 두 점을 출품하는 전시회도 가지게 되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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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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